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5년 8월 한양에서 전합니다.
"저는 뫌렌도르프가 조선정부의 대외 관계를 망치고 있음을 들어 묄렌도르프의 해임을 조선정부에 요구했습니다. 독일인들 패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로 저를 비방합니다. 하지만 그건 자신들의 몰락을 재촉할 뿐이죠. 우리 미국 정부가 저의 이러한 강경책을 인가할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개의치 않겠습니다. 옳은 일이기 때문에 밀고 나갑니다.
조선인들이 저를 좋아합니다. 굉장히 친절한 조선 친구들이 많답니다. 무엇보다 국왕이 저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러시아가 조선을 점유하는 비밀조약을 묄렌도르프와 맺었다는 그런 내용을 혹시 접하시면 그걸 믿으십시오. 실제로 그가 그런 짓을 했고 그로써 자신이 희대의 반역자임을 드러냈으니까요. "
- 1885. 8. 4. 편지에서
"날에 날마다 저는 묄렌도르프를 축출하기 위하여 조선 정부와 실랑이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외교관도 그자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을 지경이니까요. 이 싸움은 사적인 게 아니고 공적인 일입니다.
트렌턴호가 제물포에 입항했으면서도 고의로 공사관에 신고하지 않았던 사실을 제가 우리 당국에 보고했던 일이 있었지요. 이 건은 아시아 함대에서 큰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다행히 여론은 저의 편입니다. 함장은 지금 좌불안석일 겁니다.
중국인들은 조선을 다시 장악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에 있는 민영익을 귀국시켜 다시 병권을 맡기려 합니다. 중국의 지원을 받으면 민영익은 국왕보다 더 강한 권력을 가질 겁니다. 그는 일신상의 위험 때문에 귀국을 두려워 합니다. 하지만 귀국 지시는 중국에서 나온 것이어서 감히 거부하지 못할 겁니다.
아버님은 아마 신문에서 3명의 조선 망명가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사실을 읽으셨을 겁니다. 그 중 한 명이 서광범입니다. 세 명 외에는 일본에 남아 있는데 항간에서는 그들이 또 다시 거사를 꾸밀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무성하답니다. 그러나 제 판단으로는 그건 불가능합니다. 영도자 김옥균은 극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위험스런 위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목표 중의 어떤 것들은 매우 훌륭하지요.
몇 명의 미국인이 곧 이곳에 올 것 같습니다. 우리 미국 정부는 완전히 외교정책 부재 상태인 듯 합니다. 제 장래에 대해 정부로부터 어떤 소식도 없고 조선에 대해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정부의 방치에 역겨움을 억누를 수 없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저의 조선에 대한 열정은 매우 강합니다. 그 힘으로 나아가고 있지요." - 1885.8.15. 편지
그 즈음 아펜젤라라는 이름의 선교사 부부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조선에 입국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보호하고 돌보아야 했습니다. 아펜젤라 부인은 무척 아름다웠고 다변이었습니다. 세상 물정에 깜깜한 선교사들은 많은 면에서 훌륭해 보였습니다. 허나 종파간에 서로 시기 질투가 심했고 서로 헐뜯더군요.
내가 장로교 선교사를 도우려고 하면 금방 감리교 선교사가 불평하고 어깃장을 놓습니다. 한때는 그들 서로간에 말도 안하고 지내더군요. 분규가 생기면 나에게 와서 해결해달라고 합니다. 그들은 무진장한 자금을 가지고 있는 듯했고 생활이 호화스러웠습니다.
그때 9명의 선교사가 서울에 있었는데 모두 공사보다도 더 좋은 집에 살았습니다. 그런 건 뭐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몰인정한 행태를 목도하면서 역겨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나는 기독교가 그런 식으로 보여진다는 점에 안타까움과 환멸을 느꼈지요.
기독교 선교 활동에 대한 일본 공사 요시다의 정의가 정곡을 찌릅니다. "선교사업은 존경받으면서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제도이다. 지능과 종교에 대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많은 남녀가 종사하는 직업이다."
나는 러시아의 조선 장악을 저지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성과가 있었습니다. 러시아 대표가 조선을 방문했는데 그는 미국정부를 힐난했습니다. 미국이 조선을 사주하여 러시아 군사 교관을 아주 적게 초빙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러시아로부터 무려 60명의 교관이 와 있더군요. 나는 러시아 대표를 찾아가 떠져 물었고 아울러 뫌렌도르프의 비열한 행동을 지적했습니다. 그는 뫌렌도르프가 러시아를 속이고 농락했음을 알게 되었지요. 러시아 대표는 꼬리를 내리고 내게 사과했답니다. 그러나 앞으로 러시아가 조선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안심할 수 없습니다.
- 1885.8.27. 편지
예전에 언급한 바 있지만, 나는 조선의 진주 한 알을 뉴욕의 티파니사에 보내어 감정을 의뢰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가 몹시 궁금하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을 접하지 못했습니다. 한편, 조선 우표는 많은 소득을 안겨 주었지요. 일본에서 많이 팔렸는데 90불이 들어왔고 나머지는 뉴욕과 보스턴에서 매각할 참인데 약 180불 수입이 예상되었지요.
조선의 8월 날씨는 지독히 더웠습니다. 폭염에 이질도 만연했지요. 나는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가 한 달 정도 머리를 쉬고 싶은 마음 간절했지만 가망없는 바람이었지요.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