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6월 4일 김대중의 김영삼 지지시위미국교포 70여명과 함께 김영삼 지지 시위를 한 김대중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김영삼이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할 때 김대중은 미국 망명 중에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5월 20일 김영삼에게 전보를 보내 김영삼의 투쟁을 높이 평가하고 미국에서도 함께 힘을 모으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먼저 김대중은 5월 24일에 성명을 발표했고 미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6월 4일에는 이희호 여사와 교포 70여명과 함께 워싱턴D.C.에서 김영삼 지지시위를 했다. 또한 뉴욕타임즈에 보낸 기고문이 <김영삼의 단식투쟁(Kim's Hunger Strike)>라는 제목으로 6월 9일에 게재됐다.
이렇게 태평양을 넘어서 연대를 과시한 두 인물은 1983년 8월 15일 발표한 공동선언에서 "우리 두 사람은 오로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 속에서, 국민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민족과 민주 제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 그 성스러운 싸움과 승리의 현장에서 뜨겁게 만납시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와 같은 두 인물의 연대는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결성으로 이어졌고, 1985년 1월 18일 선명야당인 신한민주당(신민당) 창당으로 발전했다. 김대중은 미국 망명 생활을 마치고 총선을 4일 앞둔 2월 8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목숨을 건 귀국이었으며 2.12총선에서 신민당 돌풍에 큰 기여를 했다.
김대중-김영삼의 협력과 연대, 우리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다
2.12 총선 승리는 1987년 6월 항쟁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정당정치가 활성화되고 여기에 재야 시민사회 세력이 합세하면서 민주화세력의 중심이 단단해지고 외연이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이 구축될 수 있었다.
한국은 북한과 전쟁을 했고 그 이후에도 첨예한 군사적인 대립과 갈등이 이어져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려운 조건에 있었다. 더군다나 군사독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에 여러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곤퇴치와 양적인 성장에 성공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중적인 지지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주화는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언젠가는 이뤄질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도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다른 경로로 갈수도 있었다. 민주화는 우리 국민의 피와 눈물로 쟁취한 위대한 성과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 정치지도자로서 김대중과 김영삼은 협력과 연대를 통해 큰 기여를 했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이번에 공개한 이희호 여사의 사진자료를 통해서도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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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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