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 앞에 '의대 진학' 광고 문구가 적혀 있다. 2023.10.17
연합뉴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최고 학부인 서울대 공대는 '의·치대 사관학교'라고 불린다. 카이스트(KAIST)와 포스텍(POSTECH)의 내로라하는 과학 영재들도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이젠 학원가의 '초등 의대반'을 넘어 '의대 유치원'까지 등장할 태세다. 기초과학의 붕괴를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학창 시절 성적이 비슷했던 두 친구의 '엇갈린 운명' 이야기는 기성세대가 아이들에게 건네는 전가의 보도다. 지방 사립대 의대에 진학한 A와 공학자를 꿈꾸며 서울대 공대를 선택한 B의 현재 삶의 질이 극과 극이라는 이야기. 이젠 둘 중 서울대 공대를 추천하는 교사는 아예 없다.
"돈이 전부"
돈 앞에서 특기와 적성 따위는 개나 줘야 할 판이다. 이젠 학교의 역할이라고 여겨왔던 각자의 적성에 따른 진학 상담도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렀다. 점수와 등급에 따라 진학할 대학과 학과가 자동 변별된다. 노파심에 강조하거니와, 이는 학교의 부실한 진로 교육 탓이 아니다.
진학이든 진로든 돈이 선택의 유일한 기준이다. 천진난만한 10대 아이들조차 "돈이 전부"라고 잘라 말한다. 허구한 날 돈, 돈 하면서도 일말의 부끄러움이나 거리낌도 없다. "돈만 있으면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 빼놓곤 뭐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기성세대의 비루한 인식 뺨친다.
친구들 앞에서 돈을 펑펑 쓰는 걸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아이들도 여럿이다. 기성세대가 명품 구매로 자기를 과시하는 행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70~80만 원짜리 패딩과 운동화는 굴러다니듯 흔하고, 150만 원짜리 태블릿피시와 100만 원짜리 가방이 더는 드물지 않다.
사용하던 스마트폰이 질렸다며 백몇십만 원짜리 새것을 금세 다시 장만하는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싼 게 비지떡이라며 보급형은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한 아이의 거드름 앞에선 할 말을 잃는다. 귀에 꽂고 다니는 30여만 원짜리 무선 이어폰이 되레 검소한 물건처럼 느껴질 정도다.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거울상이다. 평소 돈 씀씀이가 크면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을뿐더러 주변엔 늘 친구들이 북적인다. 우정마저도 돈에 좌우되는 시절이다. 오래전 '부자되세요'라는 덕담과 '당신이 어디에 사는가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는 어느 아파트의 광고 문구를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는다.
자녀 사랑을 돈으로 표현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고등학생 정도 되면 서로 바빠 함께 식사하거나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여유는커녕 얼굴 볼 짬조차 없다. 부모로서 시간 내어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을 돈으로 대신하려는 것이다. 더욱이 건사할 자녀의 수도 많아야 둘이다.
'돈이 전부'임을 철석같이 믿는 아이들에게 돈은 인생의 목표일 뿐만 아니라, 사물의 모든 가치를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다. 물건도 시간도 재능도 모두 돈으로 환산되어 서열이 매겨진다. 직업이 무엇이든 각자 인생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건 상대적 비교가 가능한 연봉 액수다.
유튜브와 게임 다음으로 자주 접속하는 도박 사이트
아이들도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용돈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고 한다. 만약 로또를 살 수 있는 연령 제한이 없다면, 거리의 로또 판매점은 등하굣길 아이들로 장사진을 이룰 것이다. 주식 투자 동아리는 최근 학교마다 대세로 자리 잡았다.
이 와중에 적잖은 아이들이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기웃거리고 있다. 로또든 주식이든 미성년의 학생 신분에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이 막혀 있어서다. 돈을 쉽고 편하게 많이 벌겠다는 비뚤어진 욕망 앞에 불법이라는 말이 주는 공포심은 별것 아닌 걸로 치부된다.
아이들의 손엔 최신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고, 가정과 학교 어느 곳이든 와이파이가 설치되어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다. 스마트폰 활용 수업이나 인터넷 강의를 들을 땐 '선용'되지만, 그 외 시간에는 '악용'되기 일쑤다. 몇몇 아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유튜브나 게임 다음으로 자주 접속하는 곳이 인터넷 도박 사이트라고 한다.
무엇보다 가입하고 베팅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그 흔한 성인 인증 절차조차도 없어 스마트폰과 인터넷 활용에 익숙하다면 초등학생도 접근할 수 있다. 도박 중독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의 사례를 조사해 보면, 중학생 때 여러 도박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돈맛'을 알아버린 경우가 태반이다.
아이들의 베팅을 유도하는 인터넷 도박 사이트는 모두 불법이다. 대개 서버가 외국에 있어서 우리 정부가 손쓰기도 어렵다고 한다. 불법 사이트인 까닭에 운영 과정에서도 불법이 횡행한다. 운영자가 사이트를 의도적으로 '폭파'한 후 잠적해 피해를 봤다는 한 아이의 경험담도 들을 수 있었다.
베팅 액수도 점점 커져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는 일도 허다하다. 문제는 도중 부모와 교사에게 이실직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의외로 적다는 점이다.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도박 빚을 스스로 해결하려다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야 만다.
그들은 당장 주위 친구들에게 손을 벌리게 된다. 그다음은 기성세대가 카드빚 돌려막듯 빚을 빚으로 막아야 한다. 친구들에게 변통하다 적게는 몇만 원에서, 많게는 몇십만 원의 빚을 진 아이가 드물지 않다. 이쯤 되면 용돈을 아껴 쓰는 것만으로는 빚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