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삶에 대해 정성일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임재근
진압군과 반란군이 나란히
장군 제1묘역과 장군 제2묘역도 능선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 사이를 연결하는 보훈둘레길(노랑길 코스)이 있어 산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장군 제2묘역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인물은 대표적 분노 유발자, 당시 국방장관 노재현(장군2-523)의 묘였습니다.
장군 제2묘역에서는 정성일 시민기자가 해설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노재현 장관의 묘 앞에서 정성일 기자로부터 영화보다 더 답답한 사실을 들은 참가자들은 진압군으로 나섰던 이들의 묘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먼저 찾은 이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장군2-6) 묘역입니다. 김진기 헌병감은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함께 군사반란세력에게 연희동 위장 만찬에 유인되었다가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의 반란 사실을 알고 진압하려 경주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보안사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고 1980년 강제로 예편했습니다.
김진기 헌병감의 묘와 멀지 않은 곳에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2-132)의 묘가 있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영화에서는 정우성 배우가 열연했던 이태신의 역할로 생생히 볼 수 있었습니다. 장태완 장군도 보안사로 끌려가 강제예편 당했는데, 본인의 고초로 끝나지 않고 가족사마저 비극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TV를 통해 장태완 소장이 보안사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뒤 곡기를 끊고 매일 술에 의지하다 198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안사에서 풀려난 뒤로도 장태완은 가택 연금을 당했는데, 그 와중에도 열심히 공부한 장태완의 아들은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입학 했지만, 1982년 집을 나간 후 낙동강 변 야산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꽁꽁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장태완 장군의 부인도 장태완이 사망한 후 2년 뒤인 2012년에 아파트에서 투신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12·12 군사 반란 당시 도청을 담당했던 보안사 보안처장이었던 정도영(장군2-131)이 장태완 바로 옆에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정도영은 2010년 7월 24일에 사망했고, 장태완은 이틀 뒤인 2010년 7월 26일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진압군과 반란군이 나란히 묻혀 있는 이 모습은 마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