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의상봉 상고대북한산 의상봉 상고대
정혜영
지난달 다른 일정과 겹친 분들이 있어 한 달 거르고 만났더니 이달 모임은 더 반가웠다. 12월인데도 내내 봄 날씨 같더니 갑자기 금요일 밤 사이 기온이 곤두박질쳐서 토요일 아침은 혹한의 한복판이었다. 전날 일기예보를 보니 아침 영하권에서 시작해 점점 기온이 내려가는 기세였다.
"내일 아침 쨍한 겨울 날씨 제대로겠어요. 따뜻하게 입으시고 장갑, 방한모자 착용하세요."
겨울산의 위용과 변덕은 산행하는 사람들의 수와는 무관하니 산 대장의 책임은 클 수밖에 없다. 알록달록 꽃과 이름 모를 풀, 파릇파릇한 초록잎을 보여주던 포근한 모습과는 딴판의 산을 만날 수도 있다는 걸, 겨울 북한산을 이미 여러 차례 겪었으니 미리 예상했어야 했다.
갑작스러운 동장군을 조금은 여유롭게 맞이하고 싶은 마음에 늦은 오전 11시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최고참 언니는 컨디션이 좋지 않아 산 아래에서 둘레길을 돌며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예고된 강추위 때문인지 등산객이 현격히 적었다.
내 집 주변엔 눈이 오지 않았는데 북한산엔 새벽에 한 차례 눈이 내린 모양이었다. 얇은 홑겹의 흰 눈옷을 입은 북한산의 정경과 코끝 쨍한 영하의 날씨가 이제 진짜 겨울이 시작됐음을 확연하게 알리고 있었다.
이런 날은 경사가 심한 바위가 많은 경로는 피해야 한다는 걸, 난 그새 깜빡하고 몸에 밴 습관으로 의상봉 쪽으로 향했다. 일주일 전만 해도 산에 오르다 보면 더워져 겉옷이 거추장스럽던 기억이 판단을 흐리게 했던가.
두런두런 근황을 나누며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경사가 급한 구간이 계속 이어지면서 서서히 바뀌어 갔다. 한 발, 한 발 바위산을 오르며 조심스러워진 발길에 우리의 대화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얇게 깔린 눈은 영하의 기온에 얼어 있었고 잘못 디뎠다간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일 앞장선 내가 조금이라도 미끄럽지 않은 부분에 발을 디디며 수시로 뒤에 따라 오르는 이들에게 "천천히, 조심히 오르라"는 소리를 연거푸 해댔다. 올 한 해 몇 차례나 올랐던 구간인데도 M은, "우리가 전에 왔던 곳이 맞느냐"며 울상이었다.
계절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겨울산의 모습에 감탄만 하고 있기엔 우리의 처한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바위는 미끄럽지, 위웅위웅 몸 전체를 흔드는 바람은 또 왜 그렇게 매섭던지… 이런 상황에선 2kg만 덜 나갔어도 몸이 날아갔겠다는 농담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혼자 오를 때나 날씨가 좋을 때 오르던 경로가 살짝 언 구간이 많아 다른 방향을 찾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아이젠을 챙겨 오지 않은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채고 M이 "저, 아이젠 있어요!" 했다. K도 가방에 담아왔다고 했다. 미리 안내도 안 했는데 알아서 챙겨 오다니, 청출어람이었다.
아이젠을 한 짝씩만 나눠 채웠는데도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나머지 산행은 한 발에 채운 아이젠이 다 했다. '겨울산의 필수품은 아이젠'이란 사실을 그새 잊고 방심하다니, 이리 한심할 수가. 2~3년 차 운전자가 제일 위험하게 운전한다는데, 내가 그 짝이었다.
매주 오르던 구간이었지만 다른 일행이 혹여 미끄러져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해서인지 이번 산행은 예전 같지 않았다. 시간은 더 걸리고 마음은 더 쓰였다. 한 달에 한 번 산행에서 찍은 사진으로 자신의 카톡 프사를 교체하는 K가 이날도 사진을 위해 맞춰 입은 올 화이트 겨울 의상이 제 빛을 발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