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뮤지컬 배우를 정말 좋아한다. 그 뮤지컬 노래를 하도 듣다보니 가족들은 이제 배경음만 나와도 질색팔색한다(자료사진).
픽사베이
취향이 다소 독특하니 사람들에게 나의 덕질을 알리는 일(일명, 덕밍아웃)을 한 적이 없었다. 특히 일을 할 때는 더욱 그랬다. 어느 날 내가 일하는 말 전문 동물병원에 입원말을 돌보는 실습을 하러 온 말 관리학과 만학도 대학생 한 분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말 덕후' 느낌의 그녀
어느 날 문득 그녀를 일터에서 만나게 되었다. 시골 모자와 장화 착장의, 살짝 나이가 있어 보이는 그녀는 그저 말이 좋아 제주에 내려왔고 말산업학과 새내기로 입학했단다. 우리 병원의 입원말 관리일을 잠시 돕는 실습공고를 보고 바로 달려오셨다는 그녀의 모습은 왠지 말 덕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즈음 한창 동물병원이 바빴다. 마방 안의 오물 뭍은 깔짚을 항상 삽으로 걷어내는 모습, 말을 늘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녀가 말 덕후임을 확신했다. 어느 날 망아지 수술 후, 망아지가 마취에서 깨기를 함께 기다리며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왔다. 그녀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정말 존경스러워요. 말을 매일 보며 이렇게 다 치료해 줄 수 있잖아요. 정말 부러워요."
낯간지러워진 나는 그분께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는 뭐 하셨냐고 물었다. 이내 나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아, 저는 뮤지컬 음악감독이었어요."
"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지금 이렇게 열심히 말똥 치우고 있는 분이, 브로드웨이의 뉴욕 유학파 출신 뮤지컬계의 거장이시라니! 더 이상 나에게 이 분은 이전에 봤던 것처럼 '말덕후 만학도'가 아니었다. 내 이상향 세계의 천상인이 강림하셔서 빛을 뿜고 계셨다.
나는 방언이 터지듯,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들, 대학로 공연장들, 감명받았던 뮤지컬 장면과 넘버들을 숨도 안 쉬고 마구 나열했다. 감독님은 뮤지컬 덕후(뮤덕)인 나의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와, 저 뮤지컬 넘버 진짜 밤낮없이 들어요. 그런데 그걸 창작하시는 분이라고요? 와, 감독님 너무 존경스러워요. 공연장에 매일 있을 수 있고, 배우님들을 매일 볼 수 있다니!! 혹시 제 본진 배우님 OOO 아세요? 정말 부러워요!"
평행세계에 사는 듯한 우리
뮤지컬계에 있던 그녀는 내가 매일같이 보는 말에게 어느날 입덕했고, 제주까지 와서 말에 대해 공부한다. 그리고 말 동네에 사는 나는 어쩌다가 제주에서 뮤지컬에 입덕했고, 결국 대학로 소극장을 끊지 못하고 산다. 이건 하나의 평행세계 같았다. 그녀의 일터가 나에게는 천상세계였고, 나의 일터가 그녀에게는 천상세계였다. 알고 보니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었다. 우리는 신기해서 그저 웃었다.
내가 감독님에게 물었다.
''감독님, 극에 음악이 어떻게 그렇게 잘 맞아떨어져요? 감독님은 천재처럼 그 악상이 막 떠오르는 거죠?''
감독님은 모든 게 철저한 계산이라고 했다. 어쩔 때 관객이 놀라고, 어쩔 때 관객에게 감동이 오게 하는지에 관한 음악적 공식이 있으며 그에 맞게 곡을 짜는 것이라고 했다. 감독님의 대답은, 깔끔한 트리플액셀의 감동 뒤에, 철저한 이론과 기법이 있고, 그걸 무수히 반복했을 뿐이라는 김연아 선수의 인터뷰를 떠올리게 했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말 치료는 철저히 공식대로 한다. 나 역시 이성적으로 배우고 무수히 연습한 대로 대입하며 치료법을 익힌다. 감독님은 뮤지컬을 사랑하고 나는 말을 사랑한다. 하지만 업이 덕질이라고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이러니하다.
좋아하는 마음이 바꾸는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