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자고 보채는 강아지함께 놀자고 보채는 두강의 해맑은 미소
도희선
전방 50m 앞, '어기적 어기적 뒤뚱뒤뚱', 큰 엉덩이를 실룩대며 버스에서 내리는 나를 발견한 반려견 두강이 아빠를 재촉하는 모습이다. 나는 녀석이 한달음에 뛰어와 내게 안기기를 기대하며 두 팔을 한껏 벌린다.
꼬리꼽터를 힘차게 가동하고 내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두강의 머리를 쓰다듬은 후 본격적으로 회포를 푸나 싶은 찰나, 녀석의 눈길은 이미 나를 벗어나 있다. 버스에서 내 뒤에 내린 중학생 누나를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거나 길섶의 풀냄새를 맡거나 그도 아니면 전봇대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누가 볼세라 민망한, 짧아도 지나치게 짧고 가는 모자간의 만남이다.
개아들, 넌 내게 굴욕감을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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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에서 뛰노는 두강 온 마당을 휘젓고 다니는 장난꾸러기 ⓒ 도희선
몇 달간 직장을 다녔다. 출근할 땐 남편이 태워주고 퇴근은 버스를 이용했다. 버스 도착 시간에 맞춰 큰길까지 마중 나온 두강에게 길에서 만난 엄마는 3초짜리 하찮은 반가움이었다. 바깥세상에는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을 품은 하늘과 자유롭게 나는 새들, 풀들의 속삭임, 미세한 바람 냄새 따위가 두강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했다. 엄마가 대수로운가. 내 손길을 뿌리치는 두강에게 입을 삐쭉 내밀며 웃고 말았다.
겨울의 초입, 해그림자가 짧아지고 찬 기운에 으스스 나도 몰래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되자 남편은 퇴근 시간에도 기사 노릇을 자청했다. 차에서 먼저 내린 나를 보고 녀석은 납작 엎드려 반가움을 표했다. 그런데 쓰담쓰담을 받는 사이 머리는 내게 맡기고 눈은 연신 운전석 차 문을 향해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노룩 포옹이던가. 아빠가 내리자마자 붙잡는 나를 뿌리치고 펄쩍 뛰어올라 그의 겨드랑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애절한 장면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다.
나와는 아침에 잠깐 눈인사를 나눈 뒤 10시간 만의 만남이고 아빠와는 헤어진 지 불과 40분도 되지 않았다. 바깥에서의 만남만 짧을 것이라 위로하고 있었는데. 개아들, 넌 내게 굴욕감을 줬어. 존재감 없는 엄마는 '나 간다~'를 연거푸 외쳐 보지만 녀석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남편과 두강은 단짝이다. 2년 반 동안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곤 아침마다 1시간 반 산책을 한다. 엊그제 세 돌이 지난 천방지축에 똥꼬 발랄, 단순무식 힘자랑을 해대는 18kg 이 녀석을 데리고 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쩌다 길고양이라도 눈에 띄는 날은 쇠심줄보다 질긴 똥고집을 부리며 쫓아가려고 난리다. 함께 들판을 걷고 밥과 간식을 챙기고, 오후에는 마당에서 공놀이까지 해주는 남편에게 두강이 아빠 바라기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실 다시 직장에 나가기 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두강이 오전에 한숨 자고 났을 즈음이면 나는 전용 복장으로 갈아입고 손에는 사과나 간식거리를 들고 마당살이를 하는 녀석에게 갔다. 간식을 먹고 난 두강은 엉덩이를 바싹 붙이고 이내 내 무릎을 베고 누었다. 한참을 쓰다듬고 안고 뒹굴다시피 하다 보면 온갖 먼지와 털이 범벅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찐하게 교감을 나누었는데 몇 달 뜸하게 지냈다고 이런 푸대접을 받다니.
닭가슴살, 손두부, 단호박, 쌀밥, 당근을 곱게 다져 특별식을 만들거나, 황태죽을 끓여 받치는 것은 내 몫이다. 온갖 종류의 간식과 장난감을 사들이는 것도 나다. 하지만 밥을 먹이고 간식으로 인심을 얻고 공놀이를 하는 것은 아빠. 나는 두강이 싫어하는 빗질, 귀 청소, 털 손질로 힘들게 하는 사람으로 인식된 모양이다. 가끔 아빠 대타 노릇이나 하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과히 불편하지 않은 미미한 존재. 그게 지금의 나다. 날 봐도 덥석 안기지 않고, 이웃 사람을 만난 것처럼 납작 엎드려 거리 두기를 하는 녀석이지만 서운함보다는 미안함이 크다. 내 사랑이 부족하다는 뜻이니까.
존재 자체가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