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동의보감촌에 있는 그가 시공한 보감문.
최방식
'연장을 탓하지 않는 목수' 무일당
"재밌는 게, 한옥에선 반드시 집 이름을 편액에 써 붙이고 부르죠. 대개는 인생의 정점에 집을 짓거나 작품집 등을 내놓거든요. 그만의 철학을 담아서요. 그러니 집에 이름을 붙이는 건 존중한다는 뜻이죠. 자신과 동일시하는 문화이기도 하고요."
한옥에 단점도 없잖다. 건축비가 많게는 두 배 가까이 드는 데, 산업화가 안 된 때문이다. 수요가 적어 목수·석수·미장·와공을 구하기 어렵고, 재료 또한 시공자가 일일이 재단해야 해서 그렇다. 에너지효율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 패시브하우스처럼 과학·산업화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그가 왜 대목이 되고 진보를 꿈꿀까 궁금했는데, 시작은 꿈이었다. 부산의 동래역 앞 오두막에서 자랐다. 열차 짐을 싣고 내리는 고된 노동에 지친 아버지를 보며 건축을 꿈꿨다. 멋진 집을 지어 가족과 함께 안정적으로 살겠다는 희망.
"고교 때까지만 해도 건축가가 되겠다고 맘먹었죠. 대학갈 때 까먹었어요. 취업 잘된다는 말에 기계공학을 선택했죠. 취업은 소방 감리회사였으니, 건축 쪽이었고요. 하지만 돈벌이가 별로였고 준공심사 등이 까다로워 어찌하면 애초 꿈을 찾아갈까 늘 고민했죠."
그러던 중 IMF가 찾아왔고,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때마침 전원주택, 서양식통나무집 등 바람이 일었고, 그는 주저 없이 회사를 때려치우고 민간 한옥학교에 들어갔다. 목수 기술을 전수받는 곳이었다.
"한옥 건축을 배우다보니 당연히 대목(집 목구조를 담당하는, 도편수(한옥 시공 총책임)라고도 부름)의 길로 나갔죠. 목수 3~5년이면 '먹잡이'(목재를 재단하는, 실은 이때부터 목수라 할 수 있음)를 하는 데, 일거리가 꽤 많았습니다. 그 때부터 한옥의 구조와 특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죠."
한옥 건축 바람을 타고 그는 꽤 많은 전통건축을 시공했다. 산청 동의보감촌 중앙의 '등황전'(2010년 80억원 규모), 동의보감촌 정문(동의문, 10억)과 후문(보감문, 10억), 밀양 영남루 하주 교체공사(2005년), 금강대학(천태종) 국제선원(2009년), 민간 한옥 건축 등이다.
그렇게 전국을 떠돌다 2004년 한국 화가인 부인을 만났다. 안양의 한 사찰 목수 일을 할 때 법당 목 조각에 색 칠하는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다. 시골을 좋아하고 아이 낳지 않겠다는 등 바라는 바가 같았다고 했다. 화가인 건 그만의 바람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