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보존과학자 김지영씨
월간 옥이네
굽이치는 지리산 자락의 화엄사 각황전. 웅장함을 뽐내는 각황전이 터를 잡은 자리엔 60권의 화엄석경으로 장식된 장육전이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화염에 휩싸여 장육전 건물이 소실되며 석경 또한 조각나고 유실됐다. 1만4천여 점으로 흩어진 석경 파편에서 천 년 전의 웅장함을 떠올려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바로 이런 우리 문화유산이 소실돼 잊히지 않게끔 보존하고 되살리는 사람을 만나봤다. 문화재 보존과학자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문화재도 병원이 필요해
하삼마을, 중삼마을, 상삼마을 순으로 이어지는 충북 옥천읍 삼청리의 끝자락. 삼청 저수지 위에 자리잡아 용암사를 지붕 삼은 상삼마을의 새벽을 깨우는 이가 있다. 지난해 5월, 상삼마을의 새 주민이 된 김지영(44)씨다.
새벽 4시부터 달칵, 불이 켜진다. 가족이 있는 대전에 들렀다가 새벽께 다시 옥천으로 돌아온 김지영씨가 어두운 방 안을 환히 밝힌다. 집을 잠시 비운 사이 바깥과 다를 것 없어진 집안 온도에 얼른 난방을 올린다. 거실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 전원을 켜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겨 따뜻한 커피를 내린다. 그렇게 그의 하루가 시작된다.
"저는 문화재 보존, 그중에서 보존 상태를 진단하는 일을 해요. 병원에서 의사가 하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쉬워요. 가장 먼저 맨눈으로 주변환경과 문화재를 살펴보고, 지난 이력을 조사하죠. 그리고 나선 장비를 이용해 세밀한 상태를 진단하고서 결론을 내요. 어떤 게 문제니 이런 방식으로 치료·보존하면 된다, 이렇게요."
진단과 예방, 보존방안 제시까지가 그의 일. 진단 이후는 문화재 수리 기술자들의 영역이다. 언뜻 들으면 퍽 낯선 분야 같지만, 알고 보면 문화재 보존 일은 우리 주변에 늘 있었다. 최근 경복궁 낙서를 지우는 복원 작업도 김지영씨의 동료들이 했다.
"문화재 보존 분야는 문화재 소재의 다양성만큼 많아요. 나무, 섬유, 금속 등 소재마다 손상 양상도 다르니까요. 저는 돌, 석조 보존을 전공으로 하고 있어요. 얼마 전 경복궁 낙서 사건에 투입된 분들도 문화재 보존 일을 하는 분들이죠. 저랑 같이 공부한 동료들도 현장에 투입됐더라고요."
문화재 진단 작업은 짧게 잡아도 8개월은 걸린다. 문화재 크기와 개수에 따라 기간이 달라지기도 하는데, 보존환경까지 고려해 진단하는 경우에는 사계절을 모두 관찰해야 하기에 최소 1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적잖은 인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문화재가 오랜 세월을 견뎌내 우리에게 닿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인 수많은 손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