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픽사베이
"제 역할은 달라진 지침에 관해 안내하는 것일 뿐입니다."
시작부터 강사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표정에는 마지못해 자리에 선 것이라는 당혹스러움이 읽혔다. 어수선하기는 스크린에 띄워놓은 파워포인트 자료도 마찬가지였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는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당최 이해하기 힘들었다.
지난 21일 오후, 교육청 주관 '학교폭력 사안 처리 절차'에 대한 집합 연수가 있었다. 올해부터 달라진 지침을 일선 학교의 학교폭력 담당 교사에게 전달하는 자리였다. 관내 모든 초중고 학생부장 교사가 의무적으로 참석했고, 일부에선 교감도 함께했을 만큼 관심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개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학교마다 크고 작은 학교폭력 사안이 잇따라 몸살을 앓고 있다. 교사가 달라진 지침을 제대로 숙지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사건을 맞닥뜨리게 되어 혼선이 불가피하다. 학년 초 교육청이 부랴부랴 관련 연수를 개설한 이유다.
이태 전 코로나가 종식되고 교문이 열리면서 학교폭력의 발생 빈도가 확연히 높아졌다. 덩달아 발생 시기도 '연중무휴'가 됐다. 예년엔 학년이 시작되는 3~4월은 잠잠했다가 바깥 활동이 늘어나는 5~6월에 늘어나는 게 보통이었다. 새로운 학급 분위기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되레 학교폭력 유발 요인으로 작용하는 모양새다.
강사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현장 교사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직접 발생한 사안에 대한 구체적 대응 방법을 묻는 것에서부터 두루뭉술한 지침 내용에 대한 성토까지 봇물 터지듯 했다. 학교폭력의 유형이 각양각색이듯, 교사들의 고충 또한 천차만별이다.
강사의 답변은 명쾌하지 못했다. 학교의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현직 초등학교 교감이었음에도 지침의 맥락을 따져가며 스스로 난감해했다. 교사들의 질문에 십중팔구는 동문서답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교육청의 다른 장학사들이 '흑기사'를 자처하고 나서기도 했다.
학교폭력 처벌 강화와 담당 교사의 업무 경감. 강사가 말끝마다 강조한 이번 학교폭력 예방법 및 시행령의 개정 취지다. 이는 현 정부 들어 인사청문회 대상인 고위공직자 자녀들이 연루된 학교폭력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들끓었던 여론을 잠재우려는 교육부의 고육지책 성격이 짙다.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
이번 지침의 핵심 내용은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의 시행이다. 학교폭력이 발생했을 때, 사안 조사를 외부에서 위촉된 전담 조사관에게 맡긴다는 게 골자다. 교사의 임무는 사안 발생 사실을 곧바로 교육청에 보고하고, 피해 학생에 대한 즉각적인 보호 조치를 시행하는 것이다.
사안이 접수되면 교육청은 전담 조사관을 배정하고, 학교폭력이 발생한 학교에 방문하여 연루된 학생과 보호자를 불러 사안을 조사하고 결과를 보고한다. 학교는 정확하고 공정한 사안 조사를 위한 전담 조사관에게 독립된 공간과 노트북, 프린터 등의 기자재를 제공하여야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양측에 대한 조사가 끝나면, 학교 내 '학교폭력 전담기구'를 서둘러 개최해야 한다. 전담기구는 구성원의 1/3 이상이 학부모로 구성된 법적 기구다. 그곳에서 전담 조사관이 작성한 사안 조사 결과 보고서를 바탕으로 학교 내에서 자체 해결할지, 아니면 교육청의 학교폭력 대책심의위원회로 이첩할지를 결정하게 된다.
사안이 학교폭력 대책심의위원회로 넘어가면 학교가 개입할 여지는 아예 없다. 학교는 그저 심의위원회가 통보한 조치 결정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만약 가해자든 피해자든 심의위원회가 결정한 조치를 수용하지 않겠다면 행정소송을 제기해 사법적 판단을 받는 수밖에 없다.
실상 '학교폭력 전담 조사관 제도'를 제외하면, 과거와 견줘 절차상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사안 조사의 업무가 전담 조사관에게 통째로 넘어갔으니, 담당 교사의 업무 부담이 다소 줄어든 건 맞다. 그러나 최초 학생 당사자의 확인서를 받는 것부터가 여간 만만찮은 일이다.
최초 학생 확인서를 쓸 때부터 학부모가 개입하는 경우가 있다. 듣자니까, 학부모가 나서서 자녀에게 자필 확인서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미리 주의시키는가 하면, 학부모가 불러주는 걸 아이가 받아쓰기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최초 학생 확인서는 사안 접수 때 첨부해야 할 필수 서류다.
교사는 섣불리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용어를 사용해선 절대 안 된다. 아무리 가해와 피해 양상이 확연하다 해도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자칫 큰코다칠 수 있다. 혹여 학부모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변호인이 조치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 과정에서 법률적 다툼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교사에겐 학교폭력 사안에 일절 개입하지 않는 게 상책인 셈이다. 담임교사는 무조건 학생부장에게 사안 처리를 요청하고, 학생부장은 기계적으로 '제로 센터'로 불리는 학교폭력 지원센터에 보고하는 게 불문율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나서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결국 학교폭력은 더는 학교에서 해결될 수 없는 일이 됐다. 학교에서 예방을 위한 노력은 할 수 있을지언정 해결은 외부 전문가에 일임하도록 바뀐 것이다. 교감과 전문 상담교사, 보건 교사, 학생부장이 당연직으로 참여하는 학교폭력 전담기구조차 위상과 역할이 불분명해졌다.
전담기구는 전담 조사관의 조사 결과 보고서에 적시된 사항을 공유하고 추인할 뿐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자칫 보고서의 내용을 뒤집은 결정을 내렸다가 추후 소송이라도 제기될라치면 난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학교폭력 예방법에 근거한 전담기구가 하루아침에 유명무실해질 판이다.
연수 강사의 '슬픈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