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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파는 아빠들... 나는 삽질에 미친 광인이었다

[50대 아빠 두 꼬맹이 양육기⑥] 아들과 함께 한 모래놀이

등록 2024.04.26 14:05수정 2024.04.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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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가만히 있는 게 힘들다. 어른들은 움직이는 게 힘들다. 거기서 모든 어려움이 시작된다. 아이들은 "놀자"고 말하고, 어른들은 "쉬자"고 말한다. 춤을 멈출 수 없는 '빨간 구두' 동화 속 주인공처럼 아이들은 끊임없이 꼼지락거린다.

게다가 아이들의 꼼지락거림은 지속성이 떨어진다. 이것 조금 하다가 바꾸고, 저것 조금 하다가 바꾼다. 아이들과 노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계속 바뀌는 아이들 변덕도 어른들에겐 참 어렵다.


몇 년 전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1시간짜리 실험을 진행했다. 어떠한 신호도 주지 않을 때 아이는 놀이 지속 시간이 어느 정도 될까. 아들이 네 살 때였다. 한여름 저녁 8시에 집을 나섰다. 우리 아파트엔 놀이터가 네 개다. 일단 한 놀이터에서 놀자면서 집을 나섰다. 한 놀이터에서 적당히 놀다가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아들은 시소를 탔다. 시계 타이머를 눌렀다. "아빠, 나 미끄럼틀 탈래." 아직 1분이 지나지 않았다. "아빠, 나 그네 탈래." 또 1분 미만. "아빠, 나 징검다리 건널래." 또 1분 미만. "아빠, 나 철봉 매달릴래." 모두 다 1분 미만이었다. 순식간에 아파트 안에 있는 놀이터 네 개를 '클리어'하고 맞은편 아파트로 원정을 나섰다. 아들은 세발 자전거를 타고 나는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파트 안에 있는 놀이터도 모양이나 구성이 다르고, 아파트마다 놀이기구가 또 다르다. 맞은편 아파트엔 트램펄린이 눈에 띄었다. 맞은편 아파트에 있는 놀이터를 모두 돌았는데도 1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놀랄 만한 일이다. 모두 세 개 아파트 놀이터를 한 번씩 다 맛보고서야 1시간 여행은 끝났다. 그날 시계 타이머로 확인한 결과 어른이 아무 말도,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 때 놀이 지속은 모두 1분 이내였다.

혹시 우리 아이가 ADHD? 그렇진 않다. 내가 보기에도 아내가 보기에도, 아들을 본 주위 사람들 그 누구도 ADHD 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가 보기에 아들은 제법 끈기가 있는 편이다. 그런데도 모든 놀이가 1분 이내에 끝난다는 건 상상 이상이었다. 등에 서늘한 그 무엇이 훑고 지나갔다.

그날 사건 이후 아이가 '하자'고 하는 걸 다 따라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분짜리 놀이를 계속 따라다니며 호응해주는 건 참 힘들고 피곤한 일이다. 별로 즐겁지도 않다.


나도 즐겁고, 아이도 즐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이 고민했다. 장난감으로 놀기, 그림판에 그림 그리기, 트램펄린에서 뛰기, 블록 조립하기. 아이가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해도 내가 재밌지 않았다.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찾아냈다. 삽질. 군대 다녀온 사람이라면 다 아는 그 '삽질'이다. 


그렇게 시작된 삽질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모래놀이. 나 또한 모래놀이에 흠뻑 빠졌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모래놀이. 나 또한 모래놀이에 흠뻑 빠졌다.김대홍

유치원을 다니는 아이들이 거의 공통으로 좋아하는 놀이가 모래놀이다. 모래로 모양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건설장난감을 움직여 노는 걸 싫어하는 아이를 못봤다.

요즘은 모래가 있는 놀이터가 드물다. 동네 도서관 앞 놀이터는 모래가 깔려 있어 참 자주 갔다. 우리 아파트 후문 맞은 편 아파트 내에도 모래 놀이터가 있어 몇 번 갔다. 아이가 모래놀이를 하면 1시간 이상 놀았다. 나도 같이 건설장비를 갖고 같이 놀았지만, 흥미롭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놀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게 '삽질'이었다. 아들이 모래놀이를 할 때 아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계속 파기 시작하자 제법 커졌다. 깊이 파다가 길을 만들었다. 땅을 파니 자연스레 산이 생겼다. 구덩이가 생기고, 산이 생기고, 길이 생기니 아들은 더 즐기며 놀았다.

사람은 성과가 생기면 욕심이 생긴다. 나도 그렇다. 삽질 몇 번에 아들이 즐거워하니 '슬슬' 욕심이 생겼다. '더 깊게, 더 넓게, 더 높이 파면 더 즐거워하겠지?' 그렇게 나의 삽질이 시작됐다.

처음은 동네 놀이터였다. 작은 무대였다. 우연찮게 큰 무대를 발견했다. 차를 타고 동네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강 옆 백사장을 발견했다. 백사장은 너비가 최소한 200m는 됐다. 백사장 바로 앞은 소나무 숲이었다. 소나무 숲과 백사장 사이엔 아주 좁은 물길이 흘렀다. 폭이 50cm 정도에 불과해 아이들이 물놀이하기 딱 좋았다. 삽질을 해서 부지런히 물길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 물길이 사라졌다. 물길은 모래로 덮였다. 물을 보려면 200m 이상 걸어가야 했다. 과거 물길이 있었던 걸 나는 기억했다. 땅을 파기 시작했다. 물이 나올 때까지. 정말 오랜만에 하는 진실한 삽질이었다. 허리가 아프고, 목이 아팠다. 그래도 파고 또 팠다. 마침내 물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야호.'

아들, 잠깐만 아빠 모래 좀 파고

더 땅을 파니 연못이 생겼다. 파낸 흙으론 산을 만들었다. 다시 욕심이 생겼다. 더 큰 연못, 더 큰 산을 만들고 싶었다. 연못은 아들 무릎까지, 산은 아들 허리까지가 목표였다. 쉽지는 않았다. 1시간으론 어림도 없었다. '아빠, 아빠' 부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은 들렸지만 모르는 체했다. 왜? 더 큰 연못을 만들고 더 큰 산을 만들어야 하니까. 

매번 가면 대략 3시간씩 삽질을 했다. 그러고 나면 연못이 하나, 산이 하나 생겼다. 성취감이 들었다. 결과물이 나오면 참 뿌듯해진다. 아무리 놀아도 남는 건 즐거움뿐이지만 삽질을 하니 번듯한 구조물이 생겼다. 땀 뻘뻘 흘리며 만들어서 더 보람이 들었다. 주말마다 찾았고, 어떤 날은 토요일, 일요일 연이어서 찾았다.

시간이 맞으면 아들 친구네 지인과도 함께 강변 모래밭을 찾았다. 모래놀이 장난감 세트와 삽 두 개를 들고서. 주차하면 바로 장비 챙겨서 출동이었다. 내가 삽질을 하니 아들 친구네 아빠도 같이 삽질해야 했다. 나 때문에 그 아빠도 참 고생 많이 했다. 미안한 마음이다. 그렇게 삽질을 한 아빠들이 여럿이다.

작은 산이 큰 산이 되고, 큰 산은 더 큰 산이 됐다. 이젠 멀리서도 보일 정도가 됐다. 구덩이도 점점 깊어지고 넓어졌다. 모래 테마파크를 만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가 올 때 빼고는 강변 모래사장을 찾았다. 꽤 많은 구덩이와 산이 만들어졌다. 어느 순간 장마가 찾아왔다. 장마가 끝나자 찾아갔다. 모래 테마파크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허무했다.
 
 모래를 파서 산을 만들고 골을 만들었다. 그곳이 아이들 놀이터였다.
모래를 파서 산을 만들고 골을 만들었다. 그곳이 아이들 놀이터였다.김대홍
 
 모래를 파서 산을 만들고 골을 만들었다. 그곳이 아이들 놀이터였다.
모래를 파서 산을 만들고 골을 만들었다. 그곳이 아이들 놀이터였다.김대홍

좌절은 잠깐, 다시 삽을 들고 나섰다. 장마 뒤 다시 구덩이를 파고 산을 만들었다. 장마 이전 상태를 거의 복구했다. 한겨울에도 찾았다. 아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에 상관없이 모래놀이를 즐겼다. 두툼한 외투를 입고서 모래놀이를 했다. 놀이터 행선지는 아빠가 정했고, 아빠는 삽질 생각뿐이었다. 

그러기를 최근까지 약 2년 반. 할 때마다 목도 아팠고, 허리도 아팠다. 손목도 아팠다. 아들 모래놀이 재밌게 하라고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상황이 역전됐다. 내 삽질이 더 중요해졌다. 아들이 "아빠, 이제 가자"라고 하는 말에 "조금만 더"라고 하는 일이 잦아졌다. 사실은 내가 신났고, 내가 더 즐겼던 것 같다. 

약 2년 반 정도를 쉬지 않고 땅을 팠다. 그 시절 나는 삽질에 미친 광인, 아니 장인이었다.
#모래놀이 #놀이 #놀이터 #모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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