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산 조릿대 군락지 꽃이삭
이완우
장안산 억새 평원을 지나서 한 곳에 이르니, 드넓은 군락지의 조릿대가 모두 꽃이삭을 피웠다. 조릿대가 꽃이삭을 피우는 모습은 처음 보아서 신기했다.
조릿대는 볏과의 목본성 여러해살이풀이다. 조릿대꽃은 원추 꽃차례에 무리 지어 피는데, 자줏빛 작은 꽃이삭은 한 번 피면 지표면 위의 부분이 모두 말라버린다. 조릿대 군락지는 대나무처럼 수십 년 또는 백수십 년 주기로 일제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군락지 전체가 한 세대를 마감한다.
장안산 깊은 계곡에는 '밤마다 빨간 치마 입은 도깨비들이 모여서 빨래한다.' 등 도깨비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고 있다. 장안산 자락에 깃든 마을들은,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는 장안산 도깨비를 마을에 안녕과 복을 가져다주는 마을 수호신처럼 여겨왔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한 사람이 밤에 고갯마루를 넘어오는데 도깨비를 만났다. 저녁내 씨름하다 도깨비를 묶어놓고 집에 갔다. 다음날 가보니 몽당빗자루만 남아 있었다. 이 마을에는 밤이면 속사발에서 쇠바탕으로 도깨비불이 "쉭쉭" 하며 자주 지나갔다(원장안마을 이야기).
어른 한 분이 밤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이 도깨비에게 홀렸나보다 징을 치고 고함을 치며 찾으러 나섰다. 산속의 가운데 초막골에서 응답이 있어서 가보니, 그 어른이 맹감나무 넝쿨 안에 갇혀있었다. 옷차림도 깨끗하고 긁힌 곳도 없었다고 한다(괴목마을 이야기).
할머니 한 분이 등불을 잡고 방앗간으로 가고 있었다. 그 할머니 뒤로 여러 개의 도깨비불이 줄지어 따라갔다. 초봄이 되면 마을에서는 도깨비가 좋아하는 메밀묵을 만들어, 동네 제방과 논에 뿌리며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희평마을 이야기).
이 장안산 마을과 골짜기마다 머무는 도깨비들이 때로는 이곳 장안산 정상에 올라와 춤추고 노래하며 잔치를 벌이는지 모를 일이다. 춤과 노래를 즐기고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준다고 하는 도깨비는 장난기 많고 어리숭하기도 하여 해학적이다. 어쩌면 도깨비는 민족의 순박한 자화상이 아닐까?
장안산 정상에 도착하였다. 수십 km의 지리산 주능선이 구름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다. 덕유산, 남덕유산, 영취산, 백운산과 봉화산으로 이어져 운봉고원의 외륜을 이루는 백두대간의 끊어지지 않고 잘 이어진다.
불교적인 지명이 많은 장수 장안산에 우리의 전통 정서와 거리감이 없는 장안산 도깨비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으니, 장안산은 더욱 친근하게 다가오는 산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며칠 앞둔 오월 중순, 장안산은 충실한 생명력으로 거듭거듭 푸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