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튜브를 돌아다니다가 몇 달 전 흥행한 영화 '서울의 봄'의 클립을 봤던 적이 있다. 별 생각 없이 영상을 보고 있었는데, 영화 속 전두광의 대사 하나가 기억에 남았다.
이 정도 각오도 안 했습니까?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영상을 다 보고 난 뒤 호기심이 샘솟기 시작했다. 과연 영화 속 말대로 '실패하면 쿠데타, 성공하면 혁명'인가? 아니면 다른 기준이 있을까? 도대체 혁명과 쿠데타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주변인들에게 물어보니 '잘 모르겠다' '나도 궁금하다'는 답변만을 들을 수 있었다.
5월 16일은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은 날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박정희 소장의 행동은 쿠데타인가? 아니면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는가? 본 칼럼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혁명과 쿠데타의 정의를 살펴보고 이를 박정희 소장의 행동에 대입해 보고자 한다. 본문에서는 편의상 기존의 용어인 5.16쿠데타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우선 5.16이 왜 일어났는지, 그 후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장면 내각(대통령 윤보선)이 들어선다. 장면 내각은 민주주의적인 정부로서 이전의 부패를 청산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펼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내각은 3.15 부정선거로 대표되는 자유당 부패 세력의 단죄에 생각보다 소극적이었다.
이에 더해 1961년 3월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통칭 2대악법)을 제정해 반공 이데올로기 이외의 사상을 탄압하고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했다. 그러자 혁신계뿐만 아니라 보수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의 격한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시민사회의 반대에 '2대악법'의 제정은 유보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정부에 대한 항의와 통일을 주장하는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이때 육군사관학교 5기, 8기 졸업생들을 필두로 한 3,400여명의 군인들이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라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5월 16일 새벽 입법-행정-사법부를 전부 장악한다. 장면 정권에 불만을 품었던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를 진압하지 않았다. 결국 군부세력은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해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군부' 명의로 오랜 기간 권한을 행사할 순 없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1962년 12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63년 말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따라 1963년 10월 박정희와 윤보선이 대선에서 맞붙었다. 선거에서는 박정희가 10만 표 차이로 승리하며 진정한 '박정희 정부'가 막을 올리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출범 직후 한-일간 외교관계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정부 출범 이전인 1962년 9월 김종필-오히라 합의로 대부분의 사안을 정리한 양국은 1965년 6월 22일에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다. 한일기본조약과 그에 부속된 청구권협정을 통해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규모의 '청구권자금'을 받아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자금을 포항제철소 건립을 비롯한 경제발전 분야에 투입하였다.
또한 미국의 요청에 화답해 베트남전쟁에 총 35만명을 넘는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했다. 이때(1966) 베트남에서 전체 수출액의 25% 정도인 6,949만 달러가 들어왔다. 이후에도 많은 양의 달러가 한국으로 보내졌는데, 이를 본 박정희 정부는 기존과 달리 수출 증대를 경제성장의 핵심으로 삼고자 했다.
국내적으로는 1960년대엔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1970년대에는 중화학 공업을 성장시켜 고도성장을 이루어냈다. 또한 1971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실시해 농촌을 현대화하고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늘리고자 했다. 이와 같이 박정희 정부는 외국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내부적으로는 여러 산업을 육성하여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한일기본조약은 식민지 문제를 깔끔히 처리하지 못한 채 체결되었다는 등의 여러 비판을 받고 있다. 베트남 참전은 한국이 '미국의 용병 국가'라는 오명을 얻고, 전쟁 수행 과정의 양민학살로 인한 한국의 이미지 실추를 불러온 계기라는 목소리도 많다.
정치적으로는 1969년의 3선개헌(3연임 합법화), 1972년 유신헌법 제정으로 1인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특히 유신헌법 53조의 긴급조치권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하고 국민의 권리를 심각하게 제한했다.
오랜 시간 국민들의 불만이 쌓여온 끝에 1979년 10월 부마항쟁이 전개되었다. 그 직후인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사망하며(1917-1979, 향년 61세) 유신체제는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길을 걸어온 박정희 정부의 집권은 '쿠데타'인가, 아니면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해야 하는가? 윤진석 교수는 둘은 성공의 여부, 불법의 여부, 폭력성의 여부, 주도세력의 차이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제 붕괴 이후 건설이 있으면 혁명,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라고 정의해야 한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5.16이 쿠데타인지 아닌지는 정권 창출 이후의 행적이 건설인지 아닌지 검토함으로서 결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5·16을 정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군의 정치적 중립성 훼손, 민중의 참여가 없는 군부 집단의 권력욕, 뚜렷하고 새로운 개혁적 가치의 결여 등을 강조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5.16을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from above)'의 시작이라고 주장하는 논자들은 5·16 이후 이루어진 급속한 경제성장과 산업화를 강조한다. 또 "부르주아 없이 민주주의 없다(no bourgeoisie, no democracy)"는 명제에서 알 수 있듯이 산업화 없이 지속가능한 민주화는 불가능하기에 5·16 세력이 이룩한 산업화가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번 칼럼을 준비하며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박정희의 5,16은 "정치적 쿠데타, 경제적 혁명"이라는 다소 미온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한 분야에서의 평가를 다른 한 쪽의 평가에 종속시키기에는 각각이 남긴 발자국이 상당히 컸다.
절차와 형식을 살펴보면 5.16은 명백히 '성공한 군사 쿠데타'이다. 쿠데타 이후 3선개헌과 유신헌법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지 않고 1인 독재 체제를 공고히 했다. 또한 긴급조치권을 남용해 국민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가난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일념 아래 적극적인 경제성장 정책을 실시했고,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개발동원 체제'나 '개발독재' 등의 용어로 비판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박정희 시대에 개발과 근대화가 상당 부분 이루어졌고, 이 성장을 쉽게 부인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또한 10월 유신 이전 박정희의 정권 재창출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승리를 통해 이루어져 왔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치, 인권 분야에서 박정희 정부를 논하고자 할 때는 비판적으로 접근하되, 경제 분야에서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게 된다면 어느 한쪽을 놓치는 일 없이 박정희 시기에 관한 탐구를 이어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홍석률, 박태균, 정창현, 『한국현대사 2』, 푸른역사, 2018, pp.60-201.
윤진석, 『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이른비, 2022, pp.54-57.
김용호, 「[5·16 쿠데타 후 60년]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관련 주요 쟁점」, 『지식의 지평』, 30, 2021, pp.135-136.
김석근, 「성공한 쿠데타, 위로부터의 혁명, 그리고 5ㆍ16」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11(1), 2012, pp.225-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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