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고장도 없는가. 보문산 정상에 올라 인파 속을 비집고 구름 사이로 살짝 내민 햇살을 보고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 작품 보듯 연거푸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벌써 초복을 넘어 중복으로 줄달음질 치고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월의 물결이 거세다. 세상이 아무리 쉼 없이 돌아가도 바늘 허리에 매어 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문득 마음의 여유를 갖고 추억에 남을 여행도 하면서 살고 싶었다.
김천 직지사 둘레길 여행이다. 바람조차 무더운 요즈음 구름 몇 조각에 의지한 채 개구쟁이 소풍 가듯 김천으로 향한다. 그동안 소원(疏遠)했던 지인들도 보고 콧바람도 쐴 겸 서두르다 보니 일행보다 조금 일찍 도착이다.
직지사 문화공원 곳곳에는 비바람이 온 뒤끝이라 거리마다 푸른 잎들이 길거리에 붙어있고 구름 사이로 살포시 내민 실오라기 햇살로 묘한 운치를 더한다. 나뭇잎 떨어진 거리를 소 걸음으로 거닐다 보면 추적추적 내렸던 직전의 비로 나뭇잎 한두 개 정도는 동행이라도 하듯 신발에 달라붙는다.
잎들도 자연스러운 길동무다. 발걸음을 더할수록 일행들의 이야기꽃은 바닷가 낚싯줄 풀려나듯 피어난다. 신발에 바짝 달라붙은 잎들은 이미 길동무가 되어 떠날 줄 모른다. 백수 정완영 문학관에 이르러 신발에 붙은 잎들과 잠시 헤어진 후 작품들을 둘러본다. 동인지 〈오동〉과 시조 〈조국〉 등 해설이 맛깔스럽다.
일행은 자연스럽게 김천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딱히 기억에 남은 것은 없지만 김천의 역사를 하나라도 더 알려 주고 싶은 해설사 마음만은 여느 박물관 해설사 못지않다. 무엇보다 여행의 기억을 사로잡은 것은 예쁜 한옥에서 본 야외 풍경이다.
아로마 향기 짙은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뻥 뚫린 한옥 사각 지붕 사이로 하늘 멍으로 만사의 시름을 잊는다. 발바닥의 온기가 온몸에 펴져 나른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감미로운 음악에 취해 시 한 수를 어설프게 읊조린다. 비에 잠시 밀려났던 햇살도 시심에 젖은 듯 구름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뉘엿뉘엿 뒷산을 타고 넘어간다.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직지문화공원으로 다시 나선다. 잘 정돈된 담장 옆으로 가로수처럼 심어놓은 은행나무 사이로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은행잎들이 빛을 발산하듯 일행을 반긴다. 일행들은 각자의 이야기들을 굴비 엮듯 줄줄이 넉살 좋게 토해내며 팔각정으로 옮겨간다.
백수 문학관에서의 잔상이 여운으로 남아서일까. 시인들의 시인, 백석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일행들은 백석의 순애보에 관한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백석 시인의 걸작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뒷이야기도 놓칠 리 없다.
낮의 여흥이 아쉬웠던지 방에 둘러앉아 윷놀이가 이어진다. 개구쟁이 시절 친구들과 땅바닥에 윷판을 그려놓고 즐겼던 놀이다. 어색함도 잠시, 일행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윷을 던지는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다. 얼굴 주름살이 굵어지고 손동작만 조금 느릴 뿐 우리는 이미 다시 청춘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이 풍진 세상을 견뎌 온 사람들이지만, 마음만은 앞바다에 밀러 온 하얀 파도다.
다음날 직지사 하늘은 비가 내린 뒤 끝이라 아침 햇살로 더욱 청명하다. '사명 대사 거리'마저 아름드리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힐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직지사 여행 막바지에 홍예문 사이로 시샘 없이 흐르는 개울물 옆 산 중 다실에서 내준 대추 차는 다시 청춘이 되는 여행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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