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인 조선어사전
의령군
1919년 거족적인 3.1혁명이 일제의 무자비한 무력진압으로 좌절되면서 조선사회는 절망의 늪에 빠져들었다. 특히 민족의식이 넘치던 청년들의 좌절감은 헤아리기 어려웠다. 일제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공창제와 유곽을 만들어 청년들을 방탕의 길로 끌어들이고, 공공연히 중국에서 아편을 들여와 국민의 육신과 정신을 퇴폐시키려 들었다.
가람은 1920년 11월 조선불교회에서 박한영의 '능엄경' 강의와 권덕규의 '조선어 강의'를 듣기 시작하고, 12월 불교회의 제1회 총회에서 이사를 맡았다.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불교회와 대종교 등에 참여하는 한편 한국학에 관한 문적을 수집하였다. 이때부터 시조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국치와 참담한 식민지배의 현실에서 민족적인 것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시대적 타락상을 종교와 한국학 탐구를 통해 스스로를 지키려는 노력이었다. 1922년 4월부터 동광·휘문고등보통학교의 조선어 습자 교원으로 취직하고, 급여를 모아 서울 계동에 작은 집을 마련하여 좋아하는 난초를 기르며 정신적 안정을 유지하였다.
가람은 1920년부터 일기를 썼다. 총독이 지배하는 야만의 시대여서 정치적인 문제 대신 일상적인 내용을 담았다. 1920년 7월 31일자부터 1966년 3월 25일치까지는 <가람문서>에 <일기초(日記抄)>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그의 사후 미공개 일기가 발표되었다.
1921년 4월 4일자 일기에는 1919년 2월 도쿄 한국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를 집필하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로 활약했던 춘원 이광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4월 4일 : 구름 끼고 비 오다. 아침에 김원근씨를 찾아가서 책 한 권을 얻어 가지고 오다. 불교회에서 한별을 만났다. 서로 우스운 이야기하다가 돌아오다. 조선일보에 춘원이 돌아왔다는 말이 났다. 허영숙하고 상사병이 나서 왔단다. 무엇이 사랑스러우니 해도 춘원에게는 허영숙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이 없다. 이천만 동포니 삼천리강산이니 하고 남보다 더 떠들고 사랑하는 체한 이가 겨우 한 허영숙에게 바치었다.
나도 한 영숙이가 있으면 사랑을 바칠는지 내 스스로 모를까 알까. 아니다. 나는 허영숙이보다 더 큰 데 바치려 한다. 아직 아무데에도 무엇을 한다고 세상에 떠들지 아니했다. 나도 집에는 사랑스러운 아내도 있지마는 좀처럼 상사병은 아니 난다. 그러나 춘원 일을 들으면서 내 스스로 두려워하고 놀라 하노라. 더욱 얼을 차려 가다듬을 것이로다.
11월 26일 일기장에는 "도군을 찾았으나 못 보았다. 권덕규·임경재 등과 함께 휘문의숙에서 조선어연구회 발족식을 열었다"라고 간략히 적었다.
이광수의 변신은 조선의 청년들과 지식인들에게 곧 충격을 안겨주었다. 신문학운동의 선구자로 많은 문학작품을 쓰고 계몽적인 논설로 지명도를 날렸던 인물이다. 그리고 약관의 나이에 쓴 <2.8독립선언서>는 내용이나 문장이 빼어난 작품이었다.
상하이로 망명한 그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이 되어 유려한 필체로 독립운동가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흔들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도산 안창호는 일기(1921년 2월 18일)에 이광수의 귀국 전후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광수·최영숙(호텐)을 방문한다. 두 사람이 같이 본국으로 갈 뜻을 말하는지라, 내가 가로되 이제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적에게 항복서를 바침이니 절대불가요, 군 등 양인의 전정에 큰 화를 갖는 것이다. 속단적으로 행하지 말고 냉정한 태도로 양심의 지배를 받아 행하라.
안창호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광수는 귀국하고,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역임하고 조선문인협회장을 지내는 등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는 <민족개조론>과 <민족적 경륜>에서 조선인이 불행한 원인은 게으르고 무식하고 허위에 차 있기 때문이라는 식의 조선인 열등설을 주장하고 독립운동을 부정하여 국민적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가람은 1921년 12월 휘문의숙에서 권덕규·장지영·김윤경·임경재 등과 조선어문연구회를 조직하여 간사의 일을 맡았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최초의 한글 연구단체이다. 주시경 선생의 훈도를 받은 이들 10여 명이 한글 보급과 정착을 위해 조직한 조선어문연구회는 한글계몽 순회강연회를 열고 학회지 <한글>을 발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뒷날 조선어학회로 발전하고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는다.
그는 이보다 앞서 권덕규와 '조선어사전' 편찬을 기획하는 등 한글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일에 매달렸다. 1920년대 초 이광수 등이 변절하여 총독부의 선전원 노릇을 할 때 가람과 그의 동료들은 한글연구라는 역사의길에 나섰다. 30대 초반의 일이다. 주시경 선생의 혼이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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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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