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시인 6주기 추모행사.
성순옥
기차는 지나가고 밤꽃은 지고
밤꽃은 지고 꽃자리도 지네
오 오 나보다 더 그리운 것도 가지만
나는 남네 기차는 가네
내 몸 속에 들어온 너의 몸을 추억하거니
그리운 것들은 그리운 것들끼리 몸이 먼저 닮아 있었구나
- 허수경, '기차는 간다' 전문
고(故) 허수경(1964~2018) 시인은 '기차'처럼 갔지만 그녀를 그리워하며 '닮아'가려는 이들이 모여 추모‧기억한다. 시인은 가고 없지만 후배‧문인‧독자들이 6주기를 맞아 "추모와 기억의 자리"를 오는 10월 3일 저녁 진주문고 여서재에서 연다.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국립대 국어국문학과를 나온 허수경 시인은 대학 재학 때인 1987년 계간 <실천문학>에 시 '땡볕' 등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고인은 1992년 독일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고대근동고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독일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인은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가는 먼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생전에 펴냈고, 사후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2023년)이 나왔다.
산문집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너 없이 걸었다> <모래도시를 찾아서>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오늘의 착각>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와 소설 <모래도시> <아틀란티스야, 잘 가> <박하>, 동화 <호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마루호리의 비밀>을 펴냈다.
추모행사는 후배 성순옥 재능교육교사의 진행으로, 추모공연과 발언, 시낭송 등의 순서로 열린다. 학창시절 친구인 강경향 교사가 "내 친구 허수경", 경상국립대 전원문학회 활동을 했던 황주호 문인이 "후배 시우 수경이"에 대해 이야기 하고, 김태린 전 진주민예총 회장이 "시인을 위한 헌무", 노래패 맥박이 "허수경 시 노래"를 부른다. 노래패 맥박은 고인의 시 "바다가"에 곡(이마주)을 붙여 이미 발표했다.
최세현, 정물결, 정진남, 하미옥, 조현수씨가 고인의 "진주 저물녘", "이 가을의 무늬" 등 시를 낭송한다.
고인의 가족 허훈(동생)씨는 "나의 누이, 나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고인의 어머니가 추석 앞인 지난 13일 숨을 거두어 딸을 만나러 가셨던 것이다.
당시 지인들은 고인이 생전에 어머니를 생각하며 썼던 "꽃밥"이란 글을 소개하며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
꽃밥
진주에는 아주 맛난 음식이 많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한 가지 맛난 것. 진주비빔밥. 그 밥을 진주 사람들은 꽃밥이라고 불렀다. 색색의 갖은 나물에다 육회를 고명으로 올리는 그 음식이 하도 보기 좋아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노모가 사는 집 근처에는 시장이 있고, 그 시장 한 가운데에 비빔밥집이 있다. 노모와 나는 그 밥을 마주앉아 먹었다. 둘 다 육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보기가 좋아서 밥주시는 아주머니에게 그냥 두라고 부탁했다. 꽃밥 사이에서 우리는 마주 앉아 있었다. 노모는 노모라서 보기 좋은 것을 좋아하고 나는 그의 딸이라 또 그러하고, 햇빛이 어수선한 시장의 난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엉금엉금 보면서 우리는 꽃밥을 먹었다.
성순옥 재능교육교사는 "허수경 시인이 영면한 지 6년이 되었다. 당시 49재와 이듬해 10월 3일 1주기 추모회를 열었고 이후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온라인 추모를 해왔다"라고 했다.
그는 "진주를 말하고 역사를 말하고 반전을 시적으로 승화시킨 시인을 기리는 자리를 해마다 하지 못해 아쉬웠다. 타국 고고학 발굴지에서 온 몸을 던지면서도 모국어로 된 시를 쓰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았던 시인이다. 그녀의 시를 읽고 기억하는 일이 계속 되었으면 해서 자리를 마련했다"라고 밝혔다.
이 가을의 무늬
아마도 그 병 안에 우는 사람이 들어 있었는지
우는 얼굴을 안아주던 손이 붉은 저녁을 따른다
지난 여름을 촘촘히 짜내던 빛은
이제 여름의 무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올해 가을의 무늬가 정해질 때까지
빛은 오래 고민스러웠다 그때면,
내가 너를 생각하는 순간
나는 너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이해한다고 말하는 순간 너를 절망스런 눈빛의 그림자에 사로잡히게 했다 내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세계는 뒤돌아섰다 만지면 만질수록 부풀어 오르는 검푸른 짐승의 울음 같았던 여름의 무늬들이 풀어져서 저 술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로운 무늬의 시간이 올 때면, 너는 아주 돌아올 듯 망설이며 우는 자의 등을 방문한다 낡은 외투를 그의 등에 살짝 올려준다 그는 네가 다녀간 걸 눈치챘을까? 그랬을 거야, 그랬을 때까지 보고 있어야겠다 이제 취한 물은 내 손금 안에서 속으로 울음을 오그린 자줏빛으로 흐르겠다 그것이 이 가을의 무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