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따라 벗어놓을 것이 다르다

등록 2024.10.01 19:47수정 2024.10.01 19:4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다리가 저려서 쩔쩔매는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서 허리 협착을 완화시키는 시술을 받았다. 얼마 전 건강 검진 때 내가 벗어놓은 물건은 시계, 목걸이였지만 오늘 엄마가 벗어놓은 물건은 보청기, 틀니, 안경이다. 간호사가 건네는 종이컵에 누가 볼세라 틀니를 담고 보청기, 안경은 케이스에 넣었다.


속곳에도 지퍼가 달려 돈 넣는 주머니가 있지만, 수술실로 들어갈 때는 그 무엇도 가져갈 수가 없다. 틀니를 빼자 그림책에서나 보았을 법한 호호 할머니가 된다. 엄마를 조금이라도 젊도록 지탱했던 모든 물건을 빼놓자 짜르르 마음이 쓰라려 왔다. 귀가 들리지 않는 엄마는 누가 듣거나 말거나 큰 소리로 말하고, 나는 다른 사람이 들을까 봐 작은 소리로 답하니, 결국 손짓발짓으로 겨우 통한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아버지가 지루할까 봐 그 와중에도 걱정이 태산이다. 휠체어로 복도를 오갈 때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 손으로 입을 가리신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버지 앞에서 호호 할머니로 보이고 싶지 않은 힘겨운 몸짓이다. 여든이 되고 아흔이 되어도 임플란트를 고집하는 어르신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몸이 만 냥이면 눈이 구천 냥이라지만, 내 생각엔 이가 구천 냥 같다. 잇몸만 남은 입속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오싹한 한기를 주기 때문이다.

생선 가시를 빼준 고양이가 은혜를 갚아 이번 시술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엄마가 침대에 누워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화장실로 들어가 틀니를 사이사이 닦았다. 이 허술한 틀니에 기대어 나이 듦을 감추고 사셨구나! 수도꼭지를 크게 틀고 엄마도 아닌데 엄마만큼 중요한 틀니를 닦았다.
#허리시술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일상의 기록을 소중하게 여기는 기록중독자입니다. 차곡차곡 쌓인 기록의 양적변화가 언젠가 질적변화를 일으키길 바라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2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3. 3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4. 4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이런 곳에 '공항'이라니... 주민들이 경고하는 까닭
  5. 5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