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가 장악한 정부 산하 역사 관련 기관
민족문제연구소
독립기념관법에는 독립기념관의 목적이 "외침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지켜 온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국가 발전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전시·조사·연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의 투철한 민족정신을 북돋우며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 데에 이바지함"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독립기념관의 목적이 이러함에도 윤 정부는 거꾸로 정반대 성향의 인물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쯤 되면 국민 여론은 안중에도 없는 '오만과 탈선'이라고밖에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역사 관련 주요 기관장을 무리하게 뉴라이트 일색으로 채운 데에는 분명 숨은 의도가 있을 것이다. 역사 쿠데타를 기도했던 박근혜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사라진 줄 알았던 뉴라이트가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뉴라이트의 전사(前史)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의 시발점
뉴라이트는 도대체 언제, 무엇 때문에 출현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뉴라이트의 시발점을 '뉴라이트 전국연합'(상임의장 김진홍 목사)이 출범한 2005년 전후로 본다. 하지만 필자는 그보다 앞선 1994년이 뉴라이트가 등장한 때라고 생각한다. 3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기간 시행착오를 거치며 세력을 확장해 온 것이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라면서 북한 김일성 주석에게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한 데 이어 1994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도 같은 제안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남북회담을 관장할 통일부총리에 오랜 민주화 운동 경력을 가진 한완상 교수를 임명했다. 한 부총리는 통일정책의 '국민적 합의'를 위해 반공인사들은 물론 당시 통일운동의 주력이었던 한총련 학생들과 문익환 목사, 임수경씨 등도 잇따라 만났다. 1994년 6월 한반도가 북한 핵문제로 위기상황에 처하면서 이 문제의 타결을 중재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통해 김일성 주석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김 대통령이 즉각 수락함으로써 1994년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역대 정부 출범 때마다 남북정상회담 제안은 단골 메뉴였지만 김영삼 정부의 담대한 통일 정책과 눈앞에 다가온 남북정상회담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이철승을 비롯한 골수 반공 정치인들이었다. 이철승은 남북정상회담으로 남북이 화해와 협력의 길로 접어드는 상황을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질 총체적 위기'라면서 우익단체 결성과 잡지 창간 등을 독려했다(조선일보 1994.3.13.) 이 때 이철승 등 극우반공 정치인들이 호명한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사실 이승만은 1960년 4·19혁명 후 거의 30년 넘게 잊힌 존재에 불과했다.
이승만을 미화한 영화 〈건국전쟁〉과 다큐 〈기적의 시작〉에서는 하와이 망명 중인 이승만이 1965년 죽음을 앞두고 고국으로 가고 싶어 했다면서 신파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당시 이승만 입국을 막은 자는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이승만 노인은 눈이 어두운 독재자다. 지난날 이승만씨가 꾸며 놓았던 자유당이야말로 자기 파만의 수지타산을 제일로 치는 정당의 본보기였으며, 세계 선거 역사 가운데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부정과 불법의 흉계를 꾸미고 이를 국민에게 강요했던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