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불멍타임, 고기로 배를 채운 후에는 화로에 장작을 넣고 남은 장작으로 화로 주변을 에워쌌다
김예지
K는 강릉에 와서 비로소 삶의 우선순위를 찾았다고 고백했다.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과거에는 챙기지 못했던 가족과의 시간, 개인의 삶, 건강 같은 걸 비로소 챙길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언젠가 다시 돌아가야 할 도시를 떠올릴 때 친구의 표정은 지쳐 보였다.
매력 있게 느껴지는 소품샵... 어라, 어느새 사라진 두통
다음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부부 중 아내인 E와 단둘이 강릉의 골목을 구경하기로 했다.
강릉에는 아기자기한 소품샵이 참 많다. 비슷해 보이는 소품샵이지만 들어가 보면 저마다 다른 주인의 취향이 묻어있다. 각기 다른 향기와 음악, 단 한순간도 시선을 낭비할 틈이 없도록 밀도 있게 채워진 공간들.
그중에는 바다를 닮은 초를 파는 가게도 있었다. 사장님이 직접 초를 만드시는 한쪽 공간을 제외하고는 온통 바다다. 바다가 배경인 그림책, 파도를 담은 엽서, 그리고 에메랄드 빛깔의 초들. 같은 바다라도 매 순간 다른 모양 다른 빛깔이듯 바다를 닮은 초도 하나하나가 미묘하게 달랐다.
친구는 거기서 내게 줄 선물을 골랐다. 흘러내린 촛농이 마치 하얀 거품처럼 파란 초를 감싸고 있는, 신비한 모양의 초다. 정성스런 손길로 포장한 초를 건네며 사장님이 말을 거셨다.
"그 물개 디자인한 사람, 저 건너편 가게에 있어요."
사장님이 말씀하신 물개는 내 가방에 그려져 있다. 가방은 서울 어느 카페의 굿즈상품이고.
"가게를 직접 운영하신다고요?"
"네. 부부가 같이."
우리 집에는 이 물개가 그려진 가방뿐 아니라 티셔츠, 에코백, 커피도 있다. 그만큼 내게는 각별한 브랜드라는 의미다. 그 디자이너가 직접 운영한다는 가게를 눈앞에 두고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가게 입구는 아주 오래된 미용실 출입구 같은 허름한 철문이었다. 도대체 드나드는 사람이 있긴 할까 갸웃거리며 통과하자, 좁고 가파른 계단이 나왔다. 그 계단 끝에 가게가 있었다.
한 줄로 걷는 츄파춥스 인간들. 빌라 건물 위에 엎질러진 아이스크림. 구멍가게 문으로 상체만 억지로 구겨 넣은 고양이 궁둥이...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그림들이다. 이 공간도 마찬가지다. 입구에서부터 내부까지,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겠다는 등 독특하고 자유분방하게, 그래서 매력 있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림을 보다가 도저히 그냥 돌아설 수가 없어 엽서를 8장이나 골랐다. 고른 엽서를 계산대에 얹으며 물었다.
"혹시 이 물개 디자인하신 분이세요?"
"아, 제 아내예요. 저는 사진과 그림을 담당하고 디자이너는 아내예요."
돌아오는 차에서 미련이 남아 상호를 검색했더니, 관련된 게시물이 꽤 많다. 그중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는 부부의 사진을 클릭했다. 두 사람이 강릉에 정착한 이야기를 담은 인터뷰 기사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며 지독한 번아웃을 앓았고, 더 이상 남들과의 키 재기를 하지 않기로 결심한 후 모험처럼 강릉으로 떠나왔다고 한다. 그 한 번의 용기로 부부는 전보다 훨씬 많은 기회를 얻었고 자신들에게도 더 떳떳해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