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 동상
자료사진
파죽지세의 일본을 막아섰던 이순신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일본군 20만은 19일 만인 6월 11일(음 5월 2일) 한양에 도달한다. 그 사이에 상주 전투도 치르고, 신립 장군과의 충주 탄금대 전투도 치렀는데 말이다. 그냥 걸어와도 2주일이면 오는 거리를 20만 대군이, 전투까지 치르며 올라왔는데도 19일 밖에 안 걸렸다면 유의미한 조선의 군사적 저항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냥 무풍지대를 일본군이 치고 올라온 것이다. 이런 무풍가도에 시원한 일격을 가한 것이 바로 이순신이다.
1592년 6월 16일, 일본군이 텅 빈 경복궁을 함락시킨 나흘 후, 이순신의 첫 전투인 옥포해전이 벌어진다. 여기서 일본군 배 26척을 침몰시킨다. 전쟁 발발 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인 것이다. 같은 날 오후 합포 해전에서 적선 5척 격파, 다음날인 6월 17일 적진포 해전에서 왜선 11척을 침몰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일본군을 바다에서 멈춰 세웠다. 20여 일 후 사천 해전에서 일본 배 13척 격침. 이 전투에 처음으로 거북선을 투입한다. 이틀 후인 7월 10일 당포 해전에서 왜선 21척을 격침, 한 달 뒤인 8월 14일 그 유명한 한산도 해전에서는 적선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한다.
임진왜란 3대 대첩의 첫머리를 연 이 한산도 대첩으로 일본은 바다에서는 완전히 우리 수군에 무릎을 꿇고, 이후 서해안을 통해 한양으로 북상하여 보급로를 확보하려던 계획이 완전히 무산된다. 한편 이 전투는 육지에서 연전연패하던 육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고,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들에게도 승리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런 점에서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물줄기를 튼 중요한 전투였는데 이것은 오로지 이순신에 의해서만 가능한 승리였다.
그러나 삼도수군통제사직에서 쫓겨나고, 결국 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처참하게 궤멸된 조선 수군을 다시 물려받아야 했던 그의 심사는 어떠했을까? 특히 칠천량 패전 후,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일본 대군과 다시 일전을 벌여야 했던 그의 속은 어땠을까?
1597년 8월 27일 칠천량 해전 후 꼭 두 달 만인 10월 26일, 이순신은 13척의 배로 330척 일본 수군과 명량(울돌목)에서 맞선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에서 도망가는 바람에 남겨진 배 12척에 한 척이 더 추가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 덕에 결국 적선 133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전투를 앞둔 그는 얼마나 애간장이 타고 번민했을 것인가? 엄청난 열세에 싸우기를 두려워하는 휘하 장졸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이며, 어떤 전술을 써야 화력과 병력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고민으로 그는 아마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 것이다.
그의 고민은 그의 일기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명량해전 하루 전인 10월 25일(음 9월 15일) <난중일기>(이석호 옮김)에 그는 이렇게 썼다.
'적은 수의 수군으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치는 것이 불가하므로 진을 우수영 앞바다로 옮겨 여러 장수들을 모으고 약속하여 가로되,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한다 했음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러 장병들은 살 생각을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길 때는 군법에 의하여 처벌할 것이다.'
이른바 필사즉생(必死卽生)이요, 필생즉사(必生卽死)의 각오를 밝힌 것이다. 이순신의 절대고독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부하들에게 '살 생각을 하지 말라'고 주문하는 지휘관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 시대의 이순신을 기다리며
총체적 난국이다. 위기는 겹겹이 쌓여 있고, 나라 안팎으로는 높은 파도가 몰아칠 것이 예상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에 대응하고 풀어가야 할 리더십은 최악의 상태에 있다. 책임 있는 사람들 중에 이순신처럼 절박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쥐고 있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면서 끝까지 꿀만 빨아먹겠다는 자들만 도처에 득실거린다. 그리하여 더욱 총체적 난국이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도 했다. 이순신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이 없었다면 그 존재를 미처 드러내지 못했을 수 있다. 이 사회 어딘가에서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순신들이 있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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