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를 다룬 영화 <투더본(To The Bone)>(마티 녹슨, 2017)의 한 장면. 마티 녹슨 감독의 자전적 경험에 기반한 내용으로, 미국의 대표적인 섭식장애 자선단체인 '프로젝트힐(Project HEAL)'의 자문 하에 제작됐다.
넷플릭스
딸의 섭식장애 치료의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제가 사는 지방에 섭식장애 전문 병원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제가 사는 곳뿐 아니라 서울을 제외하고 섭식장애만을 치료하는 병원은 전국에 거의 없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의 대학병원 소아정신과조차도 섭식장애 환자를 섬세하게 봐주지는 못합니다.
당시 아직 상대적으로 양호한 BMI(체질량지수) - 17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 였기에 일단은 집에서 제가 식사 감독을 하기로 했습니다. 동시에 열심히 수소문해 뵙게 된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상담 선생님은 섭식장애를 전문으로 하시지는 않으셨으나 학생 상담을 오래 하셨고 이전에 섭식장애가 있는 학생을 상담하신 경험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호전이 없으면 방문해야 할 병원 목록까지 일단은 받아두고서 상담을 시작했습니다.
전문가의 개입이 시작됐으니 딸은 금방 좋아졌을까요? 그렇다면 섭식장애가 그렇게 예후가 나쁘다고 알려졌을 리 없겠지요. 환자분들께 제가 '당뇨병이시네요, 고혈압이에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다들 한 번씩 물어보십니다.'원인은 뭔가요? 우리 집에 당뇨 환자 없는데, 저 단 것 짠 것 하나도 안 먹어요. 제가 뭘 잘못했을까요?'
이런 질문은 원인을 알면, 또는 그 원인을 제거하면 병이 생기기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즉, 인과 관계를 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인간의 기본 사고방식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병을 귀결시킨 인자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그 많은 위험 요인을 몽땅 피하거나 없애기는 불가능하며, 더욱이 원인을 다 교정해도 몸이 저절로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는 않기 때문에 사실 '왜?'라는 질문은 이런 상황에선 그저 막막한 질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규칙적으로 약을 먹고, 운동하고, 당뇨, 고혈압에 적합한 식사를 해야 병과 함께, 그러나 그런대로 건강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요.
섭식장애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상담을 시작하고 딸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밥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는지, 학교에서 친구들과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가족에게 혹 어떤 원망이 있었는지, 자기 자신에게 불만족했던 까닭은 무엇인지, 이 모든 것을 속시원하게 알아내지도, 그 중 무엇 때문에 병이 시작됐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입을 꾹 다물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전보다 많은 말들이 오고 갔지만, 제가 보기에 아이가 붙들고 있는 거식증은 어쩌면 더 이상 '왜?'가 중요하지는 않아진 무엇이었습니다. 그 많은 '왜?'를 찾아낸들 어차피 거식증은 어떤 이유로든 아이 곁을 쉬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가슴 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다 다르고 또 한편으로는 비슷합니다. 그래서 저와 딸이 겪은 지난한 회복 과정을 자세히 기술하는 것이 불필요할 것 같지만, 대강의 분위기를 묘사하는 것은 어쩌면 의미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둘이 함께 추는 왈츠처럼 아이가 왼발을 내밀면 저는 오른발을 빼면서 그때그때 아이에게 맞추면서 식사 감독을 했습니다.
식탁에서는 늘 날이 서 있고, 아이의 구토로 막힌 변기를 뚫고, 집 안 구석구석 숨겨놓아 곰팡이가 피고 벌레가 꼬이는 씹다 뱉은 음식을 치우며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아이를 원망하는 마음도 싹트기 마련입니다.
엄마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아이는 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을까? 처음에 딸에게 들었던 안쓰러운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딸을 매섭게 비난하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있었습니다.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우리를 붙잡아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