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창원마산 만날근린고개와 바람재 일원에서 6월항쟁정신계승경남사업회, 경남6월항쟁기념사업회가 연 “6월 민주항쟁 37주년 기념 만날고개 걷기대회”에 참여한 김영만(79) 해병대 예비역이 참석했다.
우은신
- 짜빈동 전투에 참전하신 걸로 안다. 기록을 찾아보니 이 전투는 해병2여단 3대대 11중대를 주축으로 치렀다고 나와 있던데 당시 소속은.
"난 '열한중대'(김 고문은 11중대를 열한중대로 읽었다) 소속은 아니고 4.2인치 박격포를 운용하는 중포중대 요원이었는데, 열한중대에 배속돼 있다가 전투에 참전하게 됐다."
- 전투에서 부상도 당하셨다는데.
"관자놀이 있는 데서 코 안까지 파편이 박혔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헬리콥터를 타고 다낭 미 해군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 보름 정도 해군병원에 있다가 비행기로 필리핀 클라크 공군기지를 거쳐 다시 진해 해군병원으로 와 치료를 받았다. 부상 때문에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새끼손가락 하나도 입 속으로 집어넣지 못할 정도였다. 입 안에서는 계속 피비린내가 났다. 밥도 먹을 수 없어서 몇 달을 계란과 미숫가루로 연명했다."
- 치료는 제대로 받았나.
"입을 벌릴 수 없으니 군의관이 신경이 손상된 줄 알고 나보고 미국으로 보내서 치료를 받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분 나름대로는 내게 잘해주려고 했던 건데, 그런 중에 전역 날짜가 다가왔다. 동기들은 전역하는데, 나는 군 병원에 머물러 있으니 미칠 지경이었다. 군의관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했다. '제발 전역만 시켜달라'고.
당시엔 몰랐는데, 요즘 말로 트라우마를 심하게 겪고 있었던 거 같다. 군의관은 상이등급 심사를 받고 전역하라고 했는데, 그 심사가 석 달에 한 번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군대를 벗어나고 싶어서,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일단 나가서 심사를 받겠다고 하고는 전역했다. 동기들은 다 이미 전역을 한 뒤에 병원에서 전역증만 받아서 나왔다."
- 짜빈동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무공훈장도 받았다고 들었다.
"전투가 끝나자 열한중대원 전원(병사)들이 1계급 특진됐고, 몇 사람에게는 훈장이 수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에게도 화랑무공훈장이 상신됐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일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고 행정 처리가 늦었다. 그때는 훈장을 받지 못하고 전역했는데, 이후 2000년대 초반 수소문을 한 끝에 훈장증을 받을 수 있었다. 해병대사령부는 화재가 나서 당시 기록이 소실됐다고 했는데, 행정안전부를 통해 알아보니 훈장 수여기록이 나왔다."
- 시민운동, 반전평화운동에 투신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베트남에는 5개월 정도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 전투가 엄청나게 많았다. 우리 해병대도 피해가 컸다. 많은 전우들이 부상당하고 전사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봤다. 내가 겪었던 가장 충격적인 일은 베트콩(베트남 민족해방전선) 혐의자를 처형했던 사건이었다.
나는 기초적인 베트남어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하루는 보초가 나를 찾아와서 통역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떤 할머니가 찾아와 울면서 사정을 하는데 영문을 모르겠다는 거다. 나가보니 할머니 한 분이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찾아와 자기 아들이 며칠 전에 여기 잡혀왔는데, 좀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몇 시간 전 그 아들은 나와 우리 부대원들이 이미 사살해서 땅에 묻어 버린 뒤였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그 할머니 옆에 10살, 6살쯤 되는 여자아이 둘이 매달려서 같이 울고 있더라. 그 뒤에도 이때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이틀 뒤에 짜빈동 전투가 벌어졌다.
돌이켜보면 내 정신으로 살아온 것 같지 않더라. 군복도 싫고 전쟁영화도 차마 보지 못했다. 옆에서 폭탄이 터지고,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던 전우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가고, 전쟁이 한순간에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광경을 직접 봤다. 거창하게 '반전운동', 이런 거보다는 '전쟁은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몸소 깨닫게 됐다. 특히 전쟁을 쉽게 입에 올리는 인간들, 그런 집단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걸핏하면 전쟁을 들먹이더라. 이건 한참 잘못됐다. 전쟁은 하면 안 된다."
"채 상병 순직 책임 떠넘기고 거짓말까지... 해병대에선 상상도 못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