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대체 올핸 뭔 농사를 지었나' 하는 한숨을 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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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3무 농법이 나의 발목을 죄이고 있다. 나는 귀농하면서 작물에 농약을 치지 않고,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화학비료를 주지 않고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스스로 강박해 놓았다. 벌써 수년째 봄 농사를 시작할 때는 야심찬 계획이 충만하지만, 가을이 되면 '대체 올핸 뭔 농사를 지었나' 하는 한숨을 쉬곤 한다. 올해 농사도 다르지 않았고, 내년에는 '제초제를 딱 한 번만 써 볼까?' 하는 유혹마저 들었다.
벼농사 5년째... 올해도 망쳤다
우선 벼농사를 망쳤다. 귀농한 지 5년차라 벼농사도 5년째 짓고 있다. 첫해는 땅의 일부만을 경작해서 쌀 한 말을 수확했고, 다음 해부터 지난해까 지는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쌀 한 가마씩을 수확했다. 그런데 올핸 쌀 반 가마도 수확할 수 없게 되었다. 밭농사뿐 아니라 논농사도 풀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새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논농사는 5~6월에 모를 심고 나서 한달 이내에 피를 뽑아주어야 한다. 모를 심은 직후는 벼와 피의 구분이 키 차이로 명확해서 쉽게 찾아 뽑을 수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벼와 피의 키가 같아지면 둘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피 또한 벼와 마찬가지로 벼과라서 둘의 생김새나 줄기, 잎 모양이 아주 유사해서 내 실력으론 그 둘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지난해는 벼를 심은 직후 우렁이를 넣어서 피를 억제했는데 올핸 우렁이를 사다 넣을 시기를 놓쳤다. 늦은 시기에 우렁이를 넣으면 오히려 우렁이가 벼를 갉아먹는다. 거기에 피를 뽑아야 할 시기에 기간제 일이 바빠서 주말에 시간을 낼 수 없었다. 피가 벼와 엉켜 자라면 벼의 양분을 갉아 먹어서 벼가 부실해지고 수확량도 줄고, 바람이 불었을 때 쉽게 넘어져 버린다.
추석 전(前)주에 피의 이삭만을 대충 자르려고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으로 갔는데 이건 논도 아니고 밭도 아니었다. 논의 절반 정도가 피와 벼가 뒤엉켜 바람에 쓰러져 있었다. 다급한 김에 피의 이삭을 잘라내고 벼는 몇 대씩 묶어 세웠지만, 이미 쓰러져 썩어가는 벼에서 건질 수 있는 건 없을 듯하다. 벼농사를 망친 원흉이 바로 피라서 모를 심을 때 제초제를 한 번만 뿌려줬어도 사실 이렇게 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멧돼지가 휩쓸고 간 밭
벼만이 아니라 들깨와 고구마도 마찬가지로 망쳤다. 들깨 농사는 처참하다고 해야 할지 괜찮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올해 들깨 모종을 만들기 위해 모 이식 한 달 전에 모판을 서른 개 만들어 일일이 씨를 뿌려 싹을 틔웠다. 그런데 하필 가물었을 때 낚시를 하러 놀러 갔다 오면서 물을 제대로 주지 않아 심어야 할 시기 직전에 모두 말라 죽었다. 그래서 300평 큰 밭에 심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아예 밭을 놀렸다. 이건 농사가 잘 된 건지 안 된 것인지 표현하기도 어렵다. 암튼 들깨 농사로 수익 내는 건 포기했고 내 먹을 양만큼만 양파를 수확한 빈 자리에 한 50평 심었다. 그런데 이마저도 풀 관리를 하지 못해 제대로 자라나질 못했다.
지난주에 아내와 함께 고구마와 들깨를 수확하러 밭으로 갔다. 멀리서 봐도 밭인지 풀밭인지 묵힌 밭인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라 밭으로 다가가면 갈수록 작물에 미안했다. 거기에 더해서 자연농 한답시고 제초제와 비료를 쓰지 않으니 밭은 지렁이와 굼벵이의 천국이었다. 멧돼지가 지렁이와 굼벵이를 좋아하다 보니 밭은 또한 멧돼지의 천국이 되었다. 온갖 극성을 부려 땅을 온통 헤집어 놓은 통에 부러지고 뽑히고, 풀에 눌려서 어디에 들깨가 있는지 하나씩 찾아내야 했다. 아내가 들깨를 베고 나는 들깨 벤자리의 풀들을 예초했다. 한 시간 일거리도 되지 않을 들깨를 베는 데 두어 시간이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