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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못할게 뭐람..." 이 여성이 60대에 피워낸 꿈

[1막보다 화려한 2막] 그저 하고 싶어서 평생 한 공부가 내 인생의 디딤돌

등록 2024.09.03 14:18수정 2024.09.0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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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안양시민학교 한글 기초반 교사 이효순.

안양시민학교 한글 기초반 교사 이효순. ⓒ 이민선


'성인문해교육 자원봉사 교사 모집.'


이 글귀를 보고 고민에 빠진 그녀 이효순. 정부에서 운영하는 '1365 자원봉사 포털(www.1365.go.kr)에 떠 있는 모집공고였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책을 좋아해 서점 주인이 되는 꿈을 꾸던 소녀였지만,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취직해야 하는 게 그녀 앞에 놓인 현실이었다. 그래도 '서점 주인'은 꿈이라도 꿀 수 있었다. 지금보다 키가 더 커진다면 손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에게 너무 높은 곳에 있는 이름이었다. 언감생심, 품을 수도 없는 꿈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 꿈'을 대신 이뤄준 기특한 딸이 용기를 줬지만, 용기란 게 그리 쉽게 생기는 게 아니었다. 딸이 '엄마는 할 수 있어' 할 때마다 커지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평생 공부했는데, 내가 못 할 게 뭐람.'

이 생각이 불현듯 스치면서 두려움이 있던 자리를 용기란 게 차지하기 시작했다. 주경야독, 공장에서 일하면서 상업계 고등학교를 마쳤다. 학구열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회사 지원을 받으며 방송통신대학도 졸업했다. 일본어를 포함해 3개 학과를 전공했으니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12년을 더 공부한 것이다. 책에서 손을 떼고 산 기억은 없다. '그래, 거의 평생을 공부했으니, 이젠 나누자.'


8월 29일 목요일 오후 안양시민학교. 교실 문을 열자 열기가 몸으로 확 밀려들었다. 8월의 무더위로 인한 열기가 아닌 교사와 학생이 내뿜는 뜨거움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받아쓰기 광경. 육십 대 초반 이효순 선생은 책상 사이를 거닐며 쉴 새 없이 무엇인가 설명했고, 비슷하거나 조금 더 나이 들어 보이는 학생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세웠다.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려 그와 탁자 하나를 두고 마주 앉았다.

계기도 없고, 사명감도 없이 시작한 일이지만

a  안양시민학교에서 받아 쓰기 수업을 하는 이효순 선생.

안양시민학교에서 받아 쓰기 수업을 하는 이효순 선생. ⓒ 이민선


안양시민학교는 가정 형편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한글을 깨치지 못한 성인들에 대한 문해(글을 읽고 이해하는) 교육과 정보화 교육 등을 하는 평생교육 기관이다. 현재 수준별 한글 초등 3개 반과 중등 4개 반, 영어 3개 반과 함께 영어회화 반도 운영한다. 이와 함께 정보화 교육을 위한 디지털문해반(키오스크스·스마트폰 활용 교육)을 운영하고 있고 민주화 시민교육과 성인권교육도 하고 있다.

이 학교는 지난 1991년에 창립해 2009년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했다. 2012년에는 교육청으로부터 초등 학력인정 문자해득교육기관으로, 2021년에는 중학 학력인정 교육기관으로 지정받았다. 올해 2월 11회 졸업식을 했고, 누적 졸업생은 97명이다. 이 중 14명은 중등반 졸업생이다. 내년 2월 졸업 예정 인원은 초중등 포함 20명이다.

그가 성인 안양시민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22년. 25년 청춘을 바친,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식품회사를 정년퇴직한 직후다. 2024년 8월 현재 한글 기초반 교사 3년 차를 지나고 있다.

'인생 2막, 이곳을 선택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없다"라고 '뜻밖의' 대답을 했다. 이 질문에 이런 식으로 딱 잘라 답을 하는 이는 없었다. 한술 더 떠 "특별한 사명감이나 소명 의식 같은 것은 없었어요'라고 덧붙였는데, 질문을 하는 나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답변이었다. 대화를 잇기 위해 '그럼, 어린 시절 꿈이 혹시 선생님?'이라고 묻자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니요"라고 또다시 단답식 대답을 했다.

대략난감. 대화를 잇기 위한 물음을 찾지 못해 잠시 말을 멈추자 그가 "그렇지만" 하면서 대화의 맥을 이었다.

"그저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으로 시작했는데,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주변 분들이 따뜻하게 응원해서 극복할 수 있었고요. 소명 의식 같은 건 일을 하면서 생겼어요. 지금은 아주 보람 있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도 있고, 이게 갈수록 커진다는 것에 놀라기도 합니다. 정말로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그런 느낌이죠."

꿈을 꾸는 것조차 포기해야 했던 어려운 어린 시절

a  2023년 중학과정 학생 1회 졸업식,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잔디밭에서 학생과 교사가 추억의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2023년 중학과정 학생 1회 졸업식, 경기도 용인에 있는 잔디밭에서 학생과 교사가 추억의 교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 안양시민학교


이렇게 한번 터진 말은 특별한 질문이 없어도 '방언'처럼 쏟아졌다. 이 말 속에 문해교사를 인생 2막으로 선택한 이유가 녹아 있었는데, 지난 2022년 그가 MBC 표준FM <여성시대>라는 라디오 방송에서 한 이야기와 같은 내용이다. 지인이 건넨 그 방송 녹음을 듣고 이효순 선생을 만날 계획을 세웠으니, 그와 나를 만나게 해 준 연결고리는 '여성 시대'인 셈이다.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는데 공부가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는 못 갔어요. 고등학교에 보내주는 전자 회사(서울 구로공단)가 있다기에 생산직에 입사했고, 늘 잠이 부족했지만 무사히 졸업했어요. 결혼 후에는 모 식품회사에 취업해 25년 근무하고 정년퇴직할 수 있었습니다. 식품회사 취업할 때 고등학교 성적표가 큰 도움이 됐어요. 식품회사 다니면서, 방송통신대학교에서 계속 공부했고요."
-여성시대 방송 내용-

이 내용을 소개하며 "그 시절, 사람들은 우리를 공순이 공돌이라 부르며 낮게 평가해서, 한때는 과거를 숨기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제는 구로공단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그리고 꿈을 향한 노력이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했음이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이제 숨기지 않겠다는 것.

그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문해교사로 일하면서 정말로 어린 시절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찾았다는 내용이었다.

"이게(교사가) 예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인 줄을 몰랐는데, 저는 이 일을 하면서 알게 됐어요. 다시 태어나면 교사로 살고 싶어요. 그래서 딸이 초등학교 선생이 될 때 그렇게도 기뻤나 봐요. 생각해보니 교사가 되는 꿈을 품지 못한 건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갈 형편도 안됐기 때문인 것 같아요. 꿈을 꾸는 것조차 스스로 포기한 거죠."

꿈을 꾸는 것조차 포기했지만 타고난 학구열은 포기가 되지 않았다. 거의 평생을 주경야독한 이유다. 이 학구열이 '인생의 디딤돌이 돼 주었다'라고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렇지만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 한 것은 아니고, 그저 좋아서 한 것"이라며 "따지고 보면 문해교사 역시 해보고 싶어서 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좀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길 때 졸업장이 필요했고, 거기서 열심히 해서 방송대 등록금을 대주는 회사로 옮길 수 있었으니까요. 공부가 내 삶을 완전히 바꿔준 거죠. 공부는 제 인생의 디딤돌입니다."

평생의 선택 중 최고의 선택

a  안양시민학교 문해교육 교사 이효순. 제자가 쓴 글 앞에서.

안양시민학교 문해교육 교사 이효순. 제자가 쓴 글 앞에서. ⓒ 이민선


그는 퇴직 후 삶이 정말 즐겁고 보람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평생의 선택 중 최고의 선택이라 자신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미리 차근차근 준비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어떤 준비를 했느냐?'고 묻자 정확한 목표를 정한 뒤 계획하고 한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는 공부가 인생 2막을 위한 준비가 돼 주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다음 계획, 또는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이런 질문 받으면 무엇인가 멋지고 그럴듯한 답을 해야 하는데... 사실 저는 목표 같은 거 정하지 않고 살았어요. 그냥 하고 싶은 거 즐겁게 열심히 했어요. 공부도 그래서 한 것이고요. 지금도 경기대학교로 'ChatGPT' 배우러 다니는데, 이 나이에 재미없으면 어떻게 공부를 하겠어요. 굳이 목표가 있다면 지금처럼 즐겁게 열심히 사는 것이죠."

이 대답을 들으면서 인생에 꼭 필요한 3가지 '금(황금, 소금, 지금)'중 가장 중요한 것은 황금도 소금도 아닌 '지금'이란 말이 떠올랐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 역시 '지금'이었으리라.

이효순 선생에게 배우는 학생들은 대부분 글자를 몰라 평생 힘들게 산 분들이다. 자녀들조차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 삶의 고단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고단함을 "내가 초등학교만 나왔어도 이렇게 안 살았을 것"이라 표현하는 학생이 많다. 이런 학생이 무사히 초등학교 과정을 마칠 때가 교사 이효순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다.

학생이 쓴 진솔하고 가슴 절절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이게 내 길이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야'하는 소명 의식이 샘솟는다. 학생들 못지않게 어려운 어린 시절을 겪었기에, 그들의 고단함이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보람이 커지는 이유다.

"나는 중학교 급식실에서 도우미 일을 하고 있다. 일은 오후 2시에 끝나고 시민학교 공부는 12시 30분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학교 가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마음이 급해진다. 하루 3시간 일하고 33000원 받는데 택시비가 4800원이다. 택시 타고 와도 수업 시간은 2시간이나 지나버린다. 공부하고 싶은데 너무 속상하다.

내 입학식 날 바쁜 부모님 대신 큰아버지 따라서 학교에 갔다. 어쩐 일인지 사촌오빠만 입학하고 나는 입학하지 못했다. 큰아버지는 입학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를 데리고 학교 앞 술집으로 가셨다. 입학식 끝날 때까지 나는 술 드시는 큰아버지 옆에서 기다려야 했다. 큰아버지께서는 "애가 소꿉장난 하는 거 보니 아직 학교에 갈 나이가 아니다"라고 우리 부모님께 말씀하셨다고 한다. 나는 소꿉장난 한 적이 없는데...이후에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13살 무렵부터 16살까지 남의 집 애기 봐주는 일을 했다. 그때는 너무너무 서러운 일이 많았다. 빨래를 더럽게 했다고 마당에 내던져 버리고 때리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이 내가 불쌍 하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글을 모르는 탓에 회사에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식당에서 일을 했는데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근무시간도 자기네 형편에 맞게 바꿔 버렸다. 참 속상했다.

그래도 착한 남편을 만나 4남매를 낳아 잘 키웠다. 내가 가장 기뻤을 때는 큰딸의 입학통지서를 받았을 때이다. 너무 행복해서 한참 동안 가슴에 안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과거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순덕아(가명), '너무 고생했어 잘 살아줘서 고맙다'라고..."

오래전에 한글을 배운 적이 있다. 그때 계속했어야 하는데, 조금 힘들다고 그만둔 게 너무나 후회된다.
지금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순덕아, 한 시간 공부하려고 택시까지 타고 학교가는 너가 너무 훌륭해, 이번에는 포기하지 마."

나는 백합처럼 향기로운 꽃이 되고 싶은 김순덕이다."

-이효순 선생 제자 글. 2023년 안양시 평생학습 박람회 성인문해백일장 초등부문 우수상 수상.-

선생 이효순. 그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용기를 내어 인생 2막을 준비하라고 퇴직을 앞둔 이들에게 조언했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하니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토닥이듯 말했다.

인생 2막에 활짝 핀 그의 꿈을 응원한다.

a  안양시민학교 학생과 교사.

안양시민학교 학생과 교사. ⓒ 안양시민학교


a  성인문해백일장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안양시민학교 학생들.

성인문해백일장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안양시민학교 학생들. ⓒ 안양시민학교

#안양시민학교 #문해교육 #이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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