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별 육아휴직자 수를 검색해보았다.
통계청
주변에 육아휴직을 쓴 친구들이 있다. 부부가 나란히 쓴 경우도 있고, 혼자 2년을 넘게 쓴 친구도 있다. 연차나 정기휴가를 쓰듯 어렵지 않게 육아휴직을 쓰는 그들의 직업은 대개 몇 가지로 분류된다. 교사, 공무원, 그리고 은행원.
나머지 근로자들은 어떨지 한 번 검색해 보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기준 전체 임금노동자의 수는 2172만 명이고 이중 정규직 근로자는 1357만 명이다. 동해 연도 육아휴직자 수는 19.9만 명이다. 러프하게 보면 정규직 근로자 중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한 근로자의 비중은 고작 1.5%인 셈이다.
육아휴직 기간에는 근로가 없기 때문에 회사로부터 급여가 지급되지 않는다. 대신 고용보험을 통해 월 최대 110만 원 정도의 육아휴직 수당을 받는다. 충격적이고 당황스럽지만 이 금액이 소득의 전부이다.
육아휴직 기간에도 일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주 15시간 이하로 근무를 하거나, 월 최대 150만 원 이하의 소득을 받는 것만 허용된다. 구직 활동을 조금만 해보면 알 수 있다.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일자리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처음에는 생활비 문제만 어떻게든 해결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일을 쉬면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면, 복직 이후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100통이 넘게 오던 카톡과 텔레그램 메시지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제 시간에 밥을 먹고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며, 몸이 아플 때 병원을 갈 수 있었다. 40 평생 인생 중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한낱 소모품이 아닌 존엄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뻤던 만큼 복직의 충격 또한 컸다. 11개월의 달콤했던 시간들이 마치 하룻밤 꿈처럼 느껴졌다. 잠시나마 회복되었던 몸과 마음이 다시 무너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정이 아닌 회사라는 공간은 내가 누구인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만 하는지 뼛속까지 느끼게 해 주었다.
복직을 하는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경제적인 압박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수시로 나를 짓눌렀다. 기존에 내가 일하던 자리는 진즉에 다른 직원으로 대체되었다.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대안 모두가 제한적인 상황 속에서 나는 결국 부산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복직하게 되었다.
육아휴직을 준비하며 여러 가지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지만 막상 기러기 아빠가 되고 나니 당황스러웠다. 주위에서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가능하다는 주말부부라며 오히려 축하(?)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비록 주중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있지만, 그 시간을 오롯이 나를 위해 사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독하게 마음을 먹고 퇴근 이후 운동과 독서, 자기 계발에 집중한다면 성장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두 집 살림은 기본적으로 생활비가 많이 든다. 매월 나가는 월세와 관리비만 수십 만 원에 이른다. 기본적인 생필품을 모두 구매해야 하니 자질구레한 비용도 많이 발생한다. 매주 부산을 오가는 교통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하루에 한 끼는 무조건 집에서 먹고, 사 먹는 밥은 1만 원이 넘지 않도록 조절한다.
가장 힘든 순간은 아내와 아이들이 아플 때이다. 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사와 돌봄 노동까지 떠맡은 아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현재의 분리된 삶이 육아휴직의 결과인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가끔 육아휴직이라는 선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자책감과 회의감이 든다.
매일 퇴근 이후 가족과 영상통화를 한다. 아내와 두 자녀가 오늘 하루는 잘 보냈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하루 일과가 마무리된다.
"아빠, 귀찮다고 라면만 먹지 말고 밥 꼭 챙겨 먹어."
10살 딸아이는 나를 너무 잘 안다. 나는 늘 가족이 걱정인데, 딸은 오히려 나를 챙긴다. 몸에서 멀어졌는데 마음은 더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앞으로의 삶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육아휴직을 통해 달라진 내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