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에서 가장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인은 누구일까? 집권여당의 고위 인사가 사석에서 툭 던진 물음이다. 잠시 뜸들인 뒤 그가 답답하다는 듯 자답했다. 김대중 대통령이란다. 대통령에 실망하는 여론이 퍼져가고 있다는 말에 `심기'가 불편해서일까. 숨김없이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굳이 그의 `충정'까지 탓할 생각은 없다. 여론과는 거리가 멀지만 대통령 측근으로선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김 대통령이다. 혹 그 스스로도 자신만큼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인은 없다고 확신하는 것은 아닐까. 최근의 정치 풍경을 보면 그런 판단을 지울 길이 없다. 물론 작금의 정세가 김 대통령으로선 눈허리가 실 터이다. 십분 이해할 수 있다.
반세기 동안 이 땅을 짓누른 냉전체제가 시나브로 무너지는 것은 분명 그의 업적이다. 남북정상회담으로 민족사의 전환점이 마련되었음에도 야당과 언론의 모습은 퇴행적이다. 끝모를 감정적 부르대기로 냉전체제를 `사수'하려는 수구언론과 그 꾐에 덩달아 냉전으로 뒷걸음치는 제1당의 존재는 엄연한 현실이다. 더구나 수구언론이 확성기가 되어 “나라가 쪼개지고 있다”따위로 위기를 부풀리면서 여론을 오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사실이 있다. 그는 지금 집권당의 총재이자 대통령이다. 그를 선출한 유권자들은 이 땅에서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사회적이든 소외되어 온 사람들이 대다수다. 바로 그들을 대변해 기득권세력과 맞서 개혁을 이루라는 여론이 그가 집권한 바탕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여야 첫 정권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오늘 한국정치의 비극은 김 정권이 수구세력에 발목 잡혀있는 객관적 조건에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김 정권이 바로 그 수구세력들로부터 `민주'와 `개혁'의 이름으로 비난받고 있는 사실에 있다.
임기 후반이 넘자 한나라당 주류와 수구언론은 주거니 받거니 `공조'하며 남북화해정책을 흠집내고 있다. `국가적 위기' 운운하지만 그 공세의 본질은 냉전체제에서 살찐 기득권세력들의 자기이익 옹호에 있다. 하지만 오늘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터무니 없는 선동에 김 대통령이 `명분'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박지원 장관이 사표를 내기 직전까지 그를 두남둔 모습은 여론을 악화시켰다. 김 대통령은 수구언론들이 보복차원에서 박 전 장관을 여론재판 했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못지않은 진실은 박 전 장관이 수구세력들에 빌미를 주었음은 물론 그 이전에 개혁세력들로부터 줄곧 비판 받아온 점이다.
수구언론과 `원만'한 관계를 내세워 신문개혁 여론에 등돌려온 `전천후 여론수집 장관'이 오늘 당하는 뭇매는 아직 임기 중반의 김 대통령에겐 `행운'일 수도 있다. 거듭 경고했듯이 개혁세력의 도덕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수구언론에 대한 환상이 얼마나 허튼 짓인가를 박 전 장관도 깨우쳤길 바란다.
옹근 3년 전 오늘 김대중 후보는 “40년 동안 이 나라를 바르게 이끌 준비를 했다”며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임기 절반을 넘긴 오늘 묻고싶다. 누구와 더불어 `개혁'을 해왔는가. 김종필·박태준·이한동 국무총리 이하 장차관들은 물론 자신의 둘레를 스스로 돌아보라. 참신하거나 개혁적인 사람들을 얼마나 중용했는가. 오히려 개혁저항세력을 핑계로, 자신에게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 올곧은 민주인사들을 배제해 오진 않았던가.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더 나아가 개혁대상들로부터 `개혁'의 이름으로 비판, 아니 조롱 받고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미 많이 늦었다. 하지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빗듣지 말기 바란다. 김 대통령에게 `진보정치'를 기대할 생각은 전혀 없다. `가장 개혁적 정치인'이 아니어도 좋다.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는 마땅히 완수할 의무가 있다. 여론을 제대로 `수집'해 개혁전선을 근본적으로 다시 세울 때다. 아직 가야할 길이 먼 이 나라가 다시 `겨울공화국'으로 회귀할 수야 없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9월20일자)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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