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시간, 육지의 시간

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

등록 2000.09.27 15:51수정 2000.09.28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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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시간, 육지의 시간


(1)


시간의 그물은 성글지만 무엇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열풍을 거두어들인 가을의 시간이 그물을 펼칩니다.
은빛 바람이 그물에 걸려 파닥입니다.
그물 틈새로 아직은 무성한 잎새들 반짝입니다.
이제는 모두가 돌아갈 시간입니다.
정염의 시간이 가고
은일의 날들이 옵니다.

큰바람이 붑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와도 바람은 잘 줄을 모릅니다
바다 건너에는 섬으로 오는 길손들 하릴없이 묶여 있습니다
인간은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 수억 킬로 거리 행성까지 오가는
진보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실상 그 과학의 힘으로도
폭풍우 몰아치는 작은 바다 길 하나 건너지 못합니다.
우주 시대를 살고 있다고 거만을 떨지만
인간은 여전히 비구름 몰려오면 서둘러 몸을 숨기는
고양이나 들쥐와 다르지도 않습니다.
섬에 온 뒤에야 우리가 아직도 원시의 시간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가을 들면서 속도의 행렬이 멈추고 섬은 다시 자신의 시간을 되찾아 갑니다
이즈음부터 섬의 시간은 더 이상 뭍의 시간과 같지 않습니다.
하염없이 느린 구름처럼 한가로운 날들이 흘러갑니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들의 손길은 분주해 지고 겨울 바다농사 준비에
어부들 발걸음은 빨라져도 누구도 시간의 속도를 거스르지 않습니다.
그물코마다 방울방울 맺히는 땀방울에는 결코 조급한 노동의 흔적이 없습니다.
뭍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 흘러갑니다.



(2)


느린 시간 속을 걸어갑니다.
시간은 과연 절대적인 것인가.
시간이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닐까. 시간에게 묻습니다.
육지의 시간과 섬의 시간이 다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시간과 이별한 사람의 시간이 다르지 않은가.
노인의 시간과 소년의 시간을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말하지만 누군가는 늙어 버렸으나
여전히 젊음을 잃지 않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이러고도 어떻게 모든 시간이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시간은 결코 절대적이지도 동일하지도 않습니다 .
사람은 모두가 각기 자기 운명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가뭇없는 시간이 흘러갑니다.
느린 섬 위로 느린 가을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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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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