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종의 영국이야기 3> 째째한 나라에서의 백일 감회

등록 2000.11.14 14:02수정 2000.11.14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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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생활도 100일이 넘었다. 1백일을 계기로 영국이란 나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영국은 과연 어떤나라인가.

오늘은 영국 사람이 참 째째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자동차 등록세를 내러 우체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영국은 편지 문화가 발달한 나라답게 동네 곳곳에 민영 우체국이 있다.

여러 비용을 합쳐 런던의 차량 등록 사무소로 1백80파운드 한국 돈 28만원쯤을 보내는데 우체국 남자는 20파운드 소액환 9장을 한 장씩 한 장씩 세고 또 셌다. 무려 4번이나. 물론 한 장이라도 더 주면 그만큼 자기 손해다. 그렇지만 4번은 너무 했다.
문득 서울의 은행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자 행원들이 1백만원짜리 다발도 두 번 세면 끝인데.

째째한 영국 사람은 많다. 은행 이야기 2탄.
처음에 와서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중고차를 살 일이 있어서 버클레이즈 은행 지점에 갔다. 현찰로 사야 좀 깎아준다고 해서 2천5백파운드의 현금 인출을 요구했다. 은행 직원 왈, "현찰이 없으니 이틀 뒤에 오라".
은행에 현찰 4백만원이 없다니 사람을 무시하고 의심해도 분수가 있지. 평소보다 몇배 용감한 자세로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그러나 현찰은 없었다.

왜 그럴까. 몇 달을 살고 나니 그 이유를 알 것같다. 영국 사람은 가처분 소득이 적다. 다시말해 집세 내고 아이들 키우고 먹고 살다 보면 정작 제 마음대로 쓸 돈은 별로 없는 것이다. 이처럼 소득과 지출이 뻔하다 보니 현찰을 많이 갖고 다닐 필요가 없고, 그러다 보니 은행에도 거액 현찰이 별로 없는 것이다.

평범한 영국 가장의 소득 수준은 대개 연 2만파운드에서 3만 파운드다. 육체노동자가 더 잘산다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것같다. 시내버스를 타면 우리와 마찬가지로 기사모집 광고가 붙어 있는데 주급으로 3백파운드쯤을 준다고 써 있다. 월급으로 치면 2백만원이 채 안된다. 이 월급으로 4인 가족 살기는 벅차 보인다.

영국의 대학에서 무슨 행사를 하면 꼭 "밥값은 프로그램에서 낸다"는 말이 안내문에 써 있다. 우리는 수백 명이 참석하는 결혼식이나 출판 기념회를 해도 "밥값은 주최측이 부담한다"는 말은 안한다. 창피하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나. 그런데 내가 있는 로이터 프로그램에서도 불과 12명의 연구원을 상대로 행사를 치르면서도 밥값은 학교에서 낸다고 명시를 한다.


더치 페이를 매일 구경한다. 솔직히 나이어린 연구원들도 있고 가끔은 밥 한끼 사도 될만해 보여서 사려 해도 잘 안된다. 밥값이래야 대학 구내 식당에서 한끼 3-
4파운드(5천-6천원)정도다. 넷이 먹어도 2만원 안짝, 한국에서 고기 2인분 값이 채 안된다. 그런데 모두 더치페이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그냥 그렇게 낸다.

옥스퍼드에 와서 폭탄주를 한 잔도 먹어 본 적이 없다. 왜냐, 먹는 사람이 없으니까. 1백일이 되도록 양주에 맥주를 타먹는 사람도, 양주를 병째 마시는 사람도 보지 못했다.


둘째 양주 구경이 어렵다. 한국에서 인기좋은 발렌타인 17년생 같은 건 아예 없다. 큰 대형 마킷에 가면 12년생 이하의 양주는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다. 바로 스코틀랜드 옆인데도.

여기 사람들은 대신 와인을 좋아한다. 서민은 맥주, 중산층은 와인이다. 와인 한 병에 1만원, 2만원 정도한다. 그 이상 비싼 것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회식자리에서 건배도 없고 와인 2잔 정도 마시며 무슨 얘기는 그리 많은지. 술 때문에 몸보리고 돈버린 사람들은 꼭 와볼 일이다. 나도 몸무게가 5킬로그램쯤 자연 감량됐다.

우리는 흔히 서양 사람이 많이 먹는다고 알고 있다. 미국은 이 말이 맞지만 유럽은 약간 다른 것 같다. 저녁 공식 만찬에 초대됐을 때 주어지는 음식량은 대략 다음과 같다.

손바닥 3분의 2크기 연어 또는 쇠고기 스테이크. 어른 주먹 절반만한 감자 1-2개, 기타 야채 조금, 와인 2-3잔, 여기에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이나 케익 한 쪽이 추가된다. 이게 전부다.

(이렇게 조금 먹고 왜 여자들은 살이 찔까. '그것이 알고
싶다'를 되뇌이다가 엊그제 가디언 지를 보고 알게 됐다. 영국 사람 한 사람은 한해 평균 7킬로쯤의 초컬릿을 먹는다. 그것도 여자가 특히 더 좋아한다. 돌이켜 보면 미국이란 나라는 영국이나 아일랜드, 독일 등지에서 배고파 한 맺힌 사람들이 배타고 건너가 만든 나라다. 감자를 땅 속의 황금이라며 애지중지하는 나라가 이들 나라다. 유럽 국가들이 만성적 물자 부족에 시달려왔다는 반증이다. 제국주의에도 불구하고.)

동네에서 개러지(garage) 세일을 한다고 해서 가봤더니 3년전에 신던 아이 양말, 손때 묻은 동화책까지 다 판다. 1파운드를 받기 어려우면 50페니, 20페니라도 받는다. 어떻게 '우리집 귀한 아이'에게 남이 쓰던 책이나 옷을 사 입히는지 이해가 안간다.

영국 사람이 째째한 이유는 그밖에도 많이 있다.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은 한국식으로 치면 3층 연립의 2층인데 20평 남짓한 공간에 소화기가 4개나 비치돼 있다.
알다시피 영국 집이라는게 빅토리안 하우스니, 조지안 하우스니 해서 대부분 수십 수백년 된 재산 가치가 별로 없는 집이다. 건축 자재도 대부분 돌이다. 불이 나도 큰 손해날 게 없다. 비도 많이 오고 날씨도 차갑고. 그런데 소화기와 비상구는 집집마다 몇 개씩 있다.

영국 사람은 째째한데 나라는 반대다. 한국 기준으로 별 필요없는 곳에도, 안 써도 될 곳에도 돈을 팍팍 쓴다. 우리는 집안이 번듯하고 집 밖이 엉성한데 영국은 그 반대다.

인구 12만명의 옥스퍼드에는 학교 도서관 말고 순전히 주민을 위한 도서관이 7 군데다. 이사온지 얼마 안돼 집에서 가까운 섬머타운 도서관에 갔다. 신분증이 없다고 하자 "당신 앞으로 온 편지가 있으면 보여달라"고 했다. 그걸로 도서관 이용카드를 만들어줬다. 도둑 무서운줄 모르는 나라다. 책은 3주일간 비디오나 오디오 테이프는 1주일간 빌려준다. 테잎만 50페니나 1파운드씩 받는다.
도서관 하나가 2층 건물, 1백평쯤 되고 상근 직원이 3명이다. 나머지는 자원 봉사자로 충당한다.

영국의 의료보험이 좋다는 것은 소문이 나 있다. 소득과 연령, 국적, 직종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이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는다. 6개월이상 비자를 갖고 있는 외국 사람도 공짜 치료해준다. 유럽 각국에서 관광도 할겸 병도 고칠겸 오는 사람이 꽤 된다. 따라서 의사가 부족하다. 의사가 부족한 또다른 이유는 개업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의사는 원칙적으로 국가 기관이나 비영리 기관 소속이다.

의대 경쟁률이 그렇게 높지 않다. 한국처럼 병원 재벌은 아니더라도 최소 '사'자 신랑감이 되게 해줘야 의사들이 신이 나서 열심히 환자를 치료할텐데. 그래야 5분마다 환자 한 명을 고치는 '신의 손'도 많이 나올텐데 뭘 모르는 것 같다.

당연한 결과로 전체 영국 의사중 10-15%정도는 제3국 출신이다. 가끔 영어도 못 하는 의사가 있다고 신문에도 난다. 의사들은 수입에 얽매이지 않아서 그런지 환자
1명에 30분씩 시간을 낭비한다. 모든 국민이 지정된 가정의를 가질 수 있다. 그 많은 의사를 먹여 살리니 나라힘이 참 위대하다.

그리고도 엊그제 신문을 보니 학교에서 장애아들이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앞으로 3년간 8천억원을 추가로 지출할 계획이다. 현재도 충분한 수준이지만 모든 학교의 2층 계단에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고 점자 책이나 보조기구도 산다고 했다.

하기야 외국에서 온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마다 영어 특별교육 교사를 상근으로 두고 있을 정도다. 필리핀이나 네팔 어린이가 한국 국민학교에 오면 어떤 대우를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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