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키호테는 못 보고 풍차만 보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까지는 있고 한국어는 아직 없다. 따라서 자세한 안내 책자를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필수. 우리 가족의 경우는 영문으로 된 '미쉐린 그린 가이드 북'을 보았는데 여타의 한글로 된 안내서보다 내용이 충실했다고 느껴진다.
알함브라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길은 400km 남짓. 서울-부산간, 런던-파리간 거리에 해당한다. 한참을 달리자 라 만차라는 지명이 나온다. 아 '라 만차의 사나이', 돈 키호테. 그러나 돈키호테 전시관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소설 속의 인물이니까, 다만 "여기가 돈키호테가 놀던 곳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 있다.
바로 숱한 풍차. 돈키호테가 하인 산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장으로 착각해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진격해 들어가는 풍차는 작가 세르반테스 시절에도 스페인의 명물이었나 보다.
과거에는 풍차를 돌려 밀을 찧었으나 요즘에는 이를 통해 소량의 전기를 만들어내는 듯 싶었다. 남부 해안에서도 줄줄이 풍차가 서 있었다. 제주도 여미지 식물원에 가면 볼 수 있는 하얀 풍차가 한꺼번에 수십 개씩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풍차의 땅 라 만차는 마드리드 남쪽의 옛 카스틸랴 땅으로 스페인의 17개 자치구역 중 하나에 해당한다.
마드리드는 인구 300만의 스페인 수도. 첫날 길을 헤맨 이후 지금껏 잘 찾아오다가 마드리드 시내에 진입하며 길을 잃었다. 무려 2시간을 헤맨 끝에 택시 기사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호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국토탈환전쟁이 끝난 후 수도로 정해져 발전하기 시작했다. 국토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점, 당시 스페인의 주축세력인 카스띨랴 왕국의 근거지라는 점이 반영됐다고 한다.
'피레네 남쪽은 유럽이 아니다'는 나폴레옹
마드리드에서 주 스페인 대사관에 근무하는 황의승 참사관을 만나 현대 스페인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다음은 황선배의 설명.
"스페인은 유럽 국가이면서도 북아프리카의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입니다. 이미 보았겠지만 문화와 역사, 문학과 요리, 복장과 풍습에 이슬람 풍이라 할까 아프리카 냄새가 많이 배어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치러 오면서 '피레네 남쪽은 유럽이 아니다'라는 말로 부하 병사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달리 보면 지중해를 통해 아프리카에 열려 있고 대서양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열려 있는, 열린 나라입니다."
"스페인은 한편으로 지방자치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슬림과의 탈환 전쟁이 없었으면 지금도 수많은 독립 국가로 존재할지 모를 작은 나라들이 많았습니다. 무슬림에 대항해 군사동맹을 맺어 움직이다 보니 戰後(전후) 통일왕국이 쉽게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사벨 여왕의 정치력, 외교력이 크죠. 여러 차례 혼인 동맹을 통해 왕실의 피가 섞였습니다. 이사벨 여왕의 이런 노력이 없었으면 아마 오늘날의 유고처럼 됐을지 모릅니다. 요새 한국에서 왕건이 인기라던데 왕건 같은 여왕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스페인 제국도 18세기부터 차차 저물어갑니다. 그 이유를 어떤 사람은 인플레이션에서 찾습니다. 남미에서 금과 은이 엄청난 양으로 들어오다 보니 겉으로는 부자가 되고 잘 살게 됐지만 경제의 기반이 약해졌다는 얘기죠."
"한편에서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배하면서 기울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쨌든 18세기부터는 서서히 허물어집니다. 나폴레옹의 침략에 이어 중남미 식민지 국가들은 차츰 독립하고. "
"스페인은 19세기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가 가장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스페인 내전이 있었죠. 이때가 바닥입니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심한 무기력증과 불신에 빠지게 됐죠. 2차 대전 후 유럽 경제를 부흥하기 위한 미국의 마샬 플랜에서도 제외되고, UN에도 가입하지 못합니다. 이즈음 체제를 굳힌 프랑코는 경제개발을 시작합니다. 농업을 살리고 관광업을 중시하죠. "
독재를 씻고 유럽 5대 강국으로의 도약
"지금은 완전히 일어섰습니다. EU국가 중 아일랜드를 제외하고는 경제성장률 최고입니다. 연 4% 이상입니다. 프랑코가 다져놓은 경제개발의 기틀 위에서 그의 사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게 큰 힘이 됐습니다. 82년 나토, 86년 EU에 가입했습니다. 실업율이 다소 문제이긴 하지만 최근 급속히 낮아지고 있습니다."
현대 스페인의 1차 목표는 유럽 국가로서 당당하게 자리잡는 것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1만3000달러. 물가 상승률 2.3%, 이자율 2.8%, 항공기, 원자력 기술, 이동통신, 조선에서 세계 정상급. 이런 수치들과 모든 유럽 기구에의 참여를 통해 이 목표는 달성됐다.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 700만대에 불과하던 스페인의 자동차 등록대수는 이제 2130만대에 이른다.
영국의 경제전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10월 스페인 특집을 낸 적이 있는데 이 특집 기사의 필자 스테븐 휴 존스는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 맨 앞에 이렇게 적고 있다.
"30년전부터 필자는 신유럽 경제에 대해 월간으로 리포트를 만드는데 참여해오고 있다. 당시에는 보고서가 4 종류의 언어로 출판되었다. 역시 유럽의 주축을 이뤘던 영어, 독일어, 프랑스, 이탈리아어였다. 왜 스페인어가 빠졌을까. 이 나라는 유럽 사회와 거리가 있었고 경제 규모가 작았다.(후략)"
지금 이코노미스트의 보고서는 스페인어로도 발간된다. 그리고 스페인은 자신들이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유럽의 5대 강국중 하나라고 믿고 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라틴 아메리카 투자액 1위 스페인
스페인이 유럽 5대 강국 중 하나가 된 것은 역설적으로 남미와의 관계에서 입증된다. 남미는 '이베로아메리칸'이라는 명칭의 이베리아 반도 출신 백인들이 주름잡는 대륙이다. 그럼에도 모국 스페인의 몰락으로 인해 20세기 들어 양 대륙의 스페인어 국가간 교류는 극히 미약했다. 친척간의 핏줄 찾기나,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로 인한 학문적 교류 정도가 고작이었다. 2차 대전 후 영국이나 프랑스가 과거 식민지 국가들을 블록화할 때에도 스페인은 구경만 했다.
이제 스페인은 달라졌다. 프랑코 사후 경제개발과 민주화가 가속화되면서 스페인 본국 경제가 살아나고, 이는 중남미와의 교역량 증가, 활발한 인적 교류로 되돌아오고 있다. 지난해 스페인의 남미 투자액은 280억 달러로 미국을 제치고 세계 1등이었다. 스페인의 기업들은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남미로 진출하는 게 붐이다. 한계에 달한 제조업체의 생산기지 이전 사례로 많지만 금융, 보험, 이동통신 등 서비스업과 고부가가치 산업의 진출도 활발하다.
스페인의 이동통신 회사 텔레포니카는 멕시코를 중심으로 조만간 남미 사람 1000만 명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언어의 동질성에 입각한 문화산업 진출도 활발하다. 프리사라는 스페인의 미디어 그룹은 콜럼비아와 칠레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다. 마드리드의 주식 시장에는 라틴 아메리카 기업들로만 구성된 라티벡스가 따로 개설돼 유럽의 투자가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스페인의 이런 투자는 중남미 국가로부터도 환영받고 있다. 상당수 중남미 사람이 '양키 고우 홈' 구호에 찬동하는 현실에서 스페인의 대 중남미 진출은 앞으로 더 커질 전망이다.
가장 큰 이유는 언어에서 찾아야 한다. 스페인어는 현재 세계 3억 인구가 사용하고 있다. 멕시코부터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에 이르기까지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국가의 공용어는 스페인어이다. 브라질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의 차이는 스페인어의 방언보다 약간 다르다고 할까.
스페인에도 JP가 있다?
스페인의 정치적 안정도 양 대륙을 500년만에 다시 단일 경제권으로 묶는 걸 뒷받침하고 있다. 스페인은 프랑코 사후 좌파인 사회당이 십수년간 집권하다가 이제는 뻬뻬(PP)라는 이름의 우파정당 국민당이 집권하고 있다. '프랑코 잔당'이라는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우파 정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높은 것이다. 뒤집으면 이제 "우파가 집권하더라도 프랑코 시대처럼 혹독하지 않을 것"이란 안도감이 일반적 스페인 국민의 정치 정서인 셈이다.
국민당은 지난 96년 첫 집권할 때만 해도 바르셀로나가 포함된 까딸란 지역당의 푸졸 당수와 연정을 구성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2000년 3월 총선에서 단독 과반수를 넘기면서 족쇄에서 벗어나 더욱 자신감 있게 경제 정책을 펴나가고 있다. 덕분에 까딸란 지역당은 소수 지분에도 불구하고 장관과 요직을 많이 차지하던 호시절이 지나갔다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까탈란 지역 내에서도 캐스팅 보트의 상실에 대한 실망보다는 전체 국가 경제의 발전을 기대하는 분위기이다.
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안정은 스페인에 자신감을 주고 있다. 이는 조만간 양 대륙간 보다 밀접한 경제협력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브라질을 포함하면 전세계 4억 명의 인구가 거의 단일한 언어아래 경제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환 대서양 경제협력 구상이 나오고 있다.
"시에스타?, 옛말입니다".
중남미가 못산다고 하지만 대륙 전체의 1인당 평균 소득이 4000달러는 된다. 한국이 제2의 황금시장을 지구 반대편 중남미에서 찾고자 한다면 스페인어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그간 스페인과 스페인어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다. 대학의 서반아어과는 이른바 비인기학과였고 졸업해도 취업에서 별 다른 이점이 없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현장에서 본 스페인은 바닥을 치고 힘차게 올라오는 중상위권 株式(주식)이었고 무엇보다 중남미와의 연결 통로라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나라였다.
서양 문명사의 주역으로 등장하기까지 700년동안의 종교 전쟁을 치른 스페인.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주역으로 활동하던 스페인. 한동안의 침체와 혹심한 내전기를 거쳤다가 이제 다시 500년만에 경제강국으로의 회복에 나선 스페인.
그들은 이제 낮잠도 줄이고 있다. 악명(?)높은 스페인의 시에스타는 개인적 활동시간으로 바뀌고 있다. 산업화, 정보화의 물결 속에서 스페인 사람들도 과거처럼 낮잠시간에 정말 낮잠을 자는 일은 줄어드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세계 경제에의 동참이 오랜 관습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녁 식사는 관습대로 밤 11시까지 하느라 몸이 고단해하는 게 오늘의 스페인인이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와 너무 닮았다. 낮에 사우나 갈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밤늦게까지 이 모임 저 모임 다니며 정보수집하고 안면 넓혀야 탈락되지 않는 사회라는 점에서, 또한 가족관계와 우정, 의리, 체면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우리와 유사하다.
그리고 여행의 마지막은 질주
나는 그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까지 650km를, 바르셀로나에서 파리까지 1100km를 각각 하루에 달려, 1월 3일 영불간 해저 터널을 거쳐 옥스퍼드로 돌아왔다.
처음 출발할 때 주행 계기판의 눈금을 0에 놓고 달렸는데 1000마일을 3바퀴 돌고 20마일을 더 달려 집에 도착했으니 14일간 3020마일, 4800km를 달린 셈이다. 포츠머스- 빌바오간 카페리에소 보낸 이틀간의 항해 거리를 합치면 도합 5600km다.
지구 한 바퀴의 7분의 1을 달리며 무엇을 보았던가. 그것은 500년만에 도약의 나래를 다시 펴는 스페인의 과거와 오늘이다.
맺는말
* 많은 것을 생각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고목나무도 다시 꽃필 수 있다는 것을 느낀 여행이었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투쟁, 한 조그만 나라의 세계 경략 과정을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습니다. 세계사의 몇 장면을 본 느낌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그 자리에 스페인 대신 한국을 대입해보고 우리의 가능성과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의미 깊은 여행이었습니다.
스페인 여행을 계획한 것은 솔직히 "방학이니까 추운 영국을 떠나 따뜻한 스페인에서 구경 이나 하자"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예상보다 많은 걸 보았습니다. 큰 아이는 제2 외국어를 스페인어로 할 계획입니다. 또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 다시 바뀔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자체를 수확으로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준비와 지식이 시원찮아 부족한 점이 많은 여행기였습니다. 정확치 못한 인용이나 표현도 차차 나타날 겁니다. 예컨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묘사하며 제 나름으로는 의미 전달을 쉽게 한다고 '스페인 통일전쟁은 두 종교간의 제2전선에 해당한다'고 썼는데 사실은 제3 전선 같습니다. 제2 전선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함께 멸망한 동로마제국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과 함께 '스페인의 진주' 바르셀로나 이야기를 빼먹어 아쉽습니다. 추후 보완의 기회를 갖겠습니다.
저는 이번 여행을 통해 '서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게 되었습니다. 제가 본 것은 16세기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강국이었던 스페인입니다. 이 기간의 열 배 이상 되는 또 다른 시간대가 있습니다. 아울러 각각의 시간대마다 주역을 한 또 다른 나라들이 있습니다. 틈나는 대로 지속적으로 관찰할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 끝으로, 혹시 좋은 스페인 공부 모임, 서양사 공부 모임을 아시는 분은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아니면 이번 기사를 계기로 조그만 공부 모임을 만들고 싶습니다.
제 이메일 주소는 jongk21@yahoo.co.kr입니다. 감사합니다.
독자에게 약속한 별도의 註(주)
* 세빌르 이야기를 하며 '왜 악명 높은 세빌르 운전사들이 그날 따라 그처럼 얌전했는지 몰랐는데 클레르몽- 파리간 도로를 뛰어보고 알았다'고 쓴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바로 비 때문이다.
스페인의 평균적 운전자들은 빗길 운전에 익숙치 않다. 강우량이 적으니까. 반면 프랑스의 평균적 운전자들은 빗길 운전에 익숙하다. 비가 많이 오니까. 위성사진으로 보면 강우량의 차이로 인해 스페인 땅은 회색에 가깝고 프랑스 땅은 녹색에 가까울 것이다.
1월 1일 클레르몽- 파리간 300킬로미터를, 나는 빗길에 야간 운전임에도 시속 125km로 달렸다. 나만 그렇게 달린 것도 아니고, 거의 모든 운전자가 그랬다. 도로에 차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크리스마스 신정 휴가를 마치고 귀경하는 차량이 아주 많았다. 파리 입구 톨게이트의 번잡함은 얼추 비교컨대 일요일 낮 3시쯤의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서울 톨게이트와 유사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프랑스 운전자들은 톨게이트까지 편도 2차선 고속도로를 비오는 밤길에 시속 100-130km로 달렸다. 정말 운전 잘하는 국민이다. 어려서부터 자동차와 친숙해 운전을 잘하는데다가, 속도를 죄악시하지 않는 운전 풍토, 1월 1일이라 도로에 화물트럭이 없었기 때문 등으로 생각된다. 그래도 프랑스 사람의 운전 솜씨는 존경스럽다. 버벅대는 운전자가 100명에 한명만 있어도 그런 속도는 나오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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