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종의 <유럽기행> 프랑스 - 1

등록 2001.05.14 11:34수정 2001.05.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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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기는 지난 4월 18일부터 시작한 유럽 여행기의 첫번째 편이다. 지난해 7월 말부터 올해 4월 중순까지 옥스포드 대학에서의 생활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 중 하나가 '유럽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유럽을 서양 문명의 모태라고 본다. 미국과 미국 문화는,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꽤 괜찮은 F1이라고 할까. 결국은 유럽을 잘 알면 미 대륙과 오세아니아도 웬만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기간의 유럽 여행은 그래서 시작됐다.

곁다리로나마 역사를 배운 입장에서 서양 문명의 기원지인 유럽에 대해 그리 큰 존경심은 갖고 있지 않다. 로마가 한나라보다 더 융성했던가? 아니다. 중세까지 유럽은 고만고만한 나라들끼리 치고 받는 순환의 순환을 거듭했다. 기껏 잘 봐줘야 지중해 문명의 중심 축에 불과했다. 그 지중해의 패권을 가지고도 이슬람 세력과 1천년 가까이 일진일퇴를 거듭해야 했다. 육지 쪽을 보자면 고대에는 흉노족의 일파인 훈족의 침입으로 대이동을 해야 했고, 중세에는 징기스칸과 그 후예들에게 수백년간 전전긍긍했다.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한 2500년, 3천년을 놓고 볼 때 유럽은 앞의 2천년 정도는 별 볼일 없던 세력이었다. 5백년 전까지 세계사적으로 여러 소수 세력 중의 하나에 불과한, 학급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 밖에 올리지 못하는 평범한 학생이 어떻게 중심에 서고 더 강력한 F1을 낳을 수 있었는지 이것이 알고 싶었다. 무엇이 그들의 경쟁력인가. 왜 우리는 극동에 살고 그들은 세계 표준시가 시작되는 지점에 살거나 그 주변에 사는가. 무엇이 그들이 지구인의 보편적 기준을 만들어낸 원동력인가.

이러한 의문은 어찌 보면 책을 통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들이다. 또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대단한 경륜과 지식이 필요한 것들이다. 솔직히 나에게는 벅찬 주제다. 따라서 한때 유행했던 한국식 영어, you don't know, I don't know 피차 don't know의 문제를 놓고 날이면 날마다, 머무르는 그 모든 곳에서 사변(思辨)적이고 학술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이런 의문 정도는 가슴에 품고 여행을 하고 싶었다는 의지라고 할까.


프랑스 여행을 떠나다

영국 포츠머스 항을 떠난 카페리는 3시간의 항해 끝에 프랑스 셀부르 항에 닿았다. 배는 사람의 기분을 바꾼다. 불과 3시간의 뱃길이지만 육지의 견고함을 상기시키고 영국이 섬나라임을 실감케 한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만들어낸 왕립 해군, 그 해군의 모항(母港)에서 이제는 서북 프랑스로의 출발점으로 변모한 포츠머스 항에서 셀부르로 가는 바닷길은 영불 해협의 서쪽 루트에 해당한다.

이 바다는 검고 푸르다. 서울은 개나리 진달래 활짝 폈겠지만 영국은 아직 차갑고 영불 해협도 스산하다. 1944년 6월 6일 이 바다에는 수백 척의 군함이 나타났다. 이른바 대군주 작전 (Operation Overlord), 바로 노르만디 상륙작전이다. 미영 연합군이 드디어 유럽 본토에 상륙작전을 벌이면서 스탈린이 그처럼 소망했던 유럽에서의 제2 전선이 열린 것이다.

셀부르는 상륙작전이 벌어진 노르만디 반도의 서쪽 끝에 있다. 미국군은 유타, 오마하 비치, 영국군은 골드, 스워드 비치에, 캐나다군은 쥬노 비치에 내린다. 수륙양용차를 가득 메운 병사들, 하늘엔 엄호 폭격차 나타난 수백 대의 폭격기들. 셀부르에서 르 하브르까지 100km 걸친 바다는 한순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기록에는 100만명이 넘는 연합국 군대가 한 달 동안에 걸쳐 프랑스로 진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에게 셀부르는 전쟁의 피냄새보다 불란서 영화 속의 사랑으로 다가온다. 그 사랑도 전쟁의 흔적을 지울 수 없지만. '셀부르의 우산'은 평범한 남녀 기와 쥬느비에브의 사랑 이야기다. 2차대전이 터지자 군대에 간 남자 기, 그를 기다리다가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한 같은 또래 처녀 쥬느비에브. 전쟁의 시대가 낳은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셀부르를 무대로 펼쳐진다.

전장에서 돌아온 기는 어느날 음식점에서 남편, 갓난아이와 함께 외식하러 나온 쥬느비에브를 마주치고, 마지막 장면은 비바람 속에 셀부르 시내의 색색 우산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그 우산 속에는 쥬느비에브가 좋아하던 노란 우산이 빠지지 않는다. 기의 표정 연기가 압권이다.


뭔가 메시지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보고 나면 조금 답답해지는 게 프랑스 영화의 특징이라고들 말한다. 헐리웃 영화처럼 해피엔딩이든 슬픈 결말이든 결과가 눈에 딱 잡히지 않는다. 또 하나의 영화 '남과 녀'도 노르만디 반도의 해안에서 시작한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셀부르 인근의 조그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만나러 온 각각 다른 '남'과 '녀'. 이혼과 사별의 상처를 안고 있는 이들이다. 기숙 학교에 맡긴 아이들과의 짧은 한때를 위해 주말 해변을 함께 찾는다. 바닷가 뻘에 이어진 목책과 철썩이는 파도 사이에서 철모르는 아이들은 뛰놀고, 남자와 여자는 첫 데이트를 한다. 이눅크 아메던가, 눈이 커다란 여자 주인공이? 영화는 신인 발탁, 초저가로 만들어져 상당한 히트를 쳤다고 기억된다. 특히 반복적이고 운율감 넘치는 주제음악이 좋았다.

셀부르의 영화를 더듬는 사이 차는 어느새 몽 생 미셀에 닿았다.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문화유적의 한 곳으로 한국 사람들 사이에도 많이 알려진 곳이다. 말 그대로 성 미셀의 산이라는 뜻이다. 생 말로 만의 한 귀퉁이, 쓸쓸한 대서양 해변에 우뚝 솟은 바위성이다. 바닷가 평평한 곳에 갑작스레 커다란 바위산이 돌출해 있고 그 위에 수도원과 성곽이 지어져 있는 의외성 때문에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자연환경의 이변을 종교적 기적의 출현 가능성과 연결 지은 것일까. 이처럼 독특한 입지에 맨 처음 눈을 돌린 것도 종교인들이었다. 기원 10세기경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수사들이 이곳의 조그만 기도소를 고쳐 수도원을 지어 세상에 알렸다. 프랑스 대혁명 때에는 정치범 감옥으로, 이후에는 국민적 관광지가 되었다. 멀리서 보면 하늘나라에 이르는 성처럼 환상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3월과 4월, 9월과 10월의 만조기(滿潮期)에는 성 주변이 모두 바닷물에 잠긴 모습을 볼 수 있다. 거센 바닷물이 하얗게 포말을 뿜고 그 위에 홀연 솟은 성이 조명을 받아 어두운 금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면 도망갔던 신심(信心)이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이곳을 세상에 알린 베네딕트 수도사들은 누구인가.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유럽 사회의 종교적, 정치적 구심점으로 로마 교황청이 득세하고 이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로 교회의 물질적 타락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신심 깊은 이들이 기독교 순수 신앙으로의 회귀를 내걸고 만든 단체이다. 루터파나 캘빈파처럼 교리의 개혁을 내걸지 않았다는 점에서 교황청의 아들이요, 훗날 많은 교황이 베네딕트 수도회에서 배출되었다. 우리나라에도 경상북도 왜관에 베네딕트, 한국식 호칭으로 분도 수도원이 있어 무실역행의 노동과 수련에 열심하고 있다.

다음날 인근의 화강암 장미 해안(Cote de Granit Rose)에 가서도 느낀 일이지만 노르만디 서남쪽 해안 지형은 참으로 흥미롭다. 내내 평야를 이루다가 바닷가에 가면 갑작스레 기암 괴석들이 돌출 한다. 해안선 또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돌의 암질은 화강암으로서 건축재로도 많이 쓰인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성생명, 중앙일보 본사의 건물 외장에 쓰인 타일과 빛깔이 비슷하게 생겼다.

몇 년전 경상북도 청송의 주왕산에 다녀오다가 청송, 봉화 일대 국도에서 꽃돌 팝니다라는 입간판에 끌려 들른 적이 있다. 노르만디 해안과 그 아래 브레타뉴 해안가의 붉은 화강암들은 그때 보았던 꽃돌과 비슷하다. 붉은 돌 속에 국화빵 만한 크기와 모양의 하얀 돌꽃이 드문드문 박혀 있다.

돌의 모양새야 동해안 인근의 꽃돌과 비슷하지만 해안선은 영 다르다.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리아스식 해안이란 이름은 바로 이 프랑스 해안에 잇달아 있는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의 서북쪽 해안의 한 동네에서 나왔다. 노르만디와 브레타뉴의 해안은 프랑스의 리아스식 해안이다. 해안선이 꼬불꼬불하고 크고 작은 섬이 많다. 화강암 지형은 해변의 기암을 낳는데 그치지 않고 바다에도 군데군데 작은 섬을 남기고 결과적으로 복잡한 해안선을 길게 늘어뜨린 것이다.

그리고 그 해안가 성곽들에는 대포와 초소가 많다. 대서양변의 이 성곽들은 대부분 영국의 침입에 방비한 것들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백년 전쟁을 치른 사이로서 불과 1,2백년전 전까지는 가상 적국 1호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해안가에 인접한 조그만 무인도에 일단 상륙했다가 진입을 구상하는 영국군과 이를 방비하기 위해 곳곳에 초소와 망루, 대포가 있는 성곽을 마련해둔 프랑스 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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