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사이 무더기로 핀 원추리꽃

등록 2001.07.16 09:46수정 2001.07.17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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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섬을 떠나서도 섬으로밖에 갈 수 없는가.
더 갈 데 없이 오늘도 나는 섬으로 갑니다.
예송리 방파제를 떠난 배가 예작도를 지나 당사도로 접어듭니다.
삶처럼 나의 여행이 그렇듯, 오늘도 나는 느닷없이 떠나왔습니다.

남태평양 큰 바다를 한달음에 내쳐오다 애기 장수의 죽음 앞에 망연히 주저앉아 섬이 되어버린 산봉오리들. 기섬, 갈마섬, 북섬, 보길도 인근의 작은 섬들이 안개 속에서 가까워졌다 이내 멀어져 갑니다.
역사상 어떠한 민중혁명도 그 끝은 비극적이었지만 비극이 결코 역사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비극이란 결국 새로운 희망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지요.


150여년 전 저 보길도, 소안도, 당사도, 장수도에까지 숨어들어 군사를 기르던 애기 장수의 모반은 실패로 끝났고, 폭압적 권력은 부모의 손을 빌어 애기 장수를 짓이겨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지만 그것으로 인간해방운동 숨통마저 끊어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애기장수의 죽음이 애기장수의 잠을 깨웠을지언정 꿈까지 깨지는 못했지요.

한 떼의 비구름이 몰려가고 날이 개려는지 안개에 쌓여 있던 당사도가 차츰 푸른 몸빛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당사도의 몸체가 선명해질수록 내 영혼은 운해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어갈 뿐 좀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당사도를 앞에 두고도 나는 보길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가 보길도를 떠나왔지만 보길도는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는가, 보길도가 나를 떠밀었으나 내가 보길도에 애착을 멈추지 못하는가.

가파른 당사도의 절벽, 계곡 물이 불어나 여기 저기 바다로 쏟아지는 폭포가 터져 일대 장관입니다. 그 절벽들 사이사이 원추리꽃은 무슨 일로 저리 무더기무더기 피어올라 꽃사태 내는가.
일행은 당사도 선착장을 눈앞에 두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몸을 곧추세웁니다. 이내 우리를 태우고 온 배의 선장, 당사도 이장님이 다시 앉으라고 채근합니다. 배를 대야 하는데 우리가 앞을 가렸으니 욕지거리 안들은 게 천만 다행이지요.
내 시야가 트이면 뒷사람의 시야가 가려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삽니다.

선착장에 배가 정박하고, 이장님은 방파제 공사 관계자들과 볼일이 있으니 우리 먼저 이장님댁에 올라가 있으라 합니다. 얼마간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자 마을의 집들이 난간을 붙들고 위태롭게 서 있습니다.
지척에 두고도 애달아 할 뿐 올 수 없었던 당사도.
내가 오늘 당사도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제주 MBC 촬영팀 덕분입니다. 정홍전, 고민정, 박석, 김성철 님들, 이들 모두가 불청객의 동반을 흔쾌히 허락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양은실 작가로부터 보길도 동행 촬영 요청을 받고도 시간이 없어서 일부만 동행하겠노라고 탐탁치 않게 답변했던 내가 당사도 촬영까지 따라가겠다고 쫓아왔으니, 그러고 보면 나도 어지간히 낯두꺼운 사람인 게지요. 아마 누군가 나의 여행길에 동행을 요청했다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을 것입니다.

촬영팀이 당사리 신지운 이장님 댁에 머물러 있는 틈을 타 나는 마을 안 길을 배회합니다. 섬의 형태가 임금 왕(王)자 모양이어서 민중의 왕이 나올 예정이었으나 어느날 갑자기 점 복(卜)자를 쓰는 복생도가 솟아나 섬의 형국이 구슬 옥(玉)자로 변하는 바람에 임금이 나지
못했다는 전설의 섬 당사도.
지금도 보길도 적자산에 올라가서 보면 당사도의 생김새가 그대로 임금 왕자 모양임을 확인할 수 있지요. 나는 지금 임금 왕자 전설의 그 허리 자락쯤을 걷고 있습니다.


마을길이 끝나는 지점, 언덕 끝에 언뜻 보기에도 폐교스러운 낡은 학교 건물이 서있습니다. 한때 학생수가 100명이 넘기도 했다던 당사도 유일의 교육기관, 항립국민학교가 분교로 격하됐다가 폐교된 지 벌써 10년, 우리 나라 교육 현실처럼 저 학교 건물 또한 10년 넘도록 대책없이 방치돼 있습니다.

현재는 당사도에 단 한명의 초등학생이 있는데, 당사도에 분교라도 있었으면 독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전망 좋은 교실에서 호사를 누렸을 이장님의 그 어린 아들은 큰 풍랑이 몰아쳐도 폭풍우를 뚫고 작은 어선에 의지해 노화도까지 고생스러운 통학길을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취학할 나이가 될 무렵 이장님은 교육청에 분교 설치를 요청했는데 교육청에서는 하숙비를 지원해줄테니 학교가 있는 곳에 하숙을 시키라고 했다더군요.
이장님은 초등학교 1학년짜리 아들을 차마 하숙시킬 엄두가 나지 않아 몇 년째 위험스런 뱃길로 아이를 등하교 시키고 있다 합니다.


풀밭으로 변한 학교 운동장 한 모퉁이에는 옛날처럼 수국이 피어있습니다. 폐교 관사에서 누가 사는지 인기척이 들립니다. 환청인가.
누굴까 궁금증이 일었지만 나는 풀지 않고 발길을 돌립니다.

이 마을도 늙음이 점령한 지 이미 오래인가, 젊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 바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보길도나 소안도 같은 큰 섬들보다 못할 것이 없을 테지만 그런 섬들과는 달리 학교조차 없는 당사도에 아이 가진 젊은 사람들이 다시 들어와 살기가 쉽지 않은 까닭일 겁니다.
벌써 마을 주민들의 평균연령도 65세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이제 저 노인들까지 이승을 떠나고 나면 젊은 사람 한둘만이 살아 남겠지요. 그러나 그들도 곧 나이들 것이고, 그러면 이 섬도 오래잖아 무인도였던 300년전처럼 다시 무인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을을 둘러본 일행은 군사 작전에나 쓸 법한 이장님의 고무 보트를 타고 당사도 등대로 향합니다. 등대로 가는 길은 육로와 해로 두 길이 있는데 우리는 오늘 중으로 다시 보길도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여 아무래도 빠른 물길을 택했습니다. 정박할 곳이 없어서 일행을 내려주고 이장님의 고무 보트는 당사리 마을 포구로 돌아가고 우리는 등대로 갑니다.

등대까지는 5분이면 된다던 이장님의 말과는 달리 깍아지른 급경사 시멘트 포장길을 30분도 더 올라간 다음에야 등대가 나타납니다.
이제 우리는 '목포지방 해운 항만청 당사도 항로 표지 관리 사무소' 앞에 서 있습니다. 등대지기들이 심었는지 등대 초입 손바닥만한 비탈 밭에도 고구마 줄기가 제법 길게 뻗어 있습니다. 등대치고 주변 경관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을 터지만 당사도 등대는 그 많은 등대 중에서도 경관이 빼어나기로 첫 자리에 꼽히는 곳입니다.
깍아지른 천길 낭떠러지 위에 자리잡고 있으나 위태로운 느낌보다는 청량하고 시원스런 느낌이 더 큰 것도 다 수려한 경관 덕분일 테지요.

남서쪽으로는 멀리 여서도와 장수도, 추자도 등의 섬들이 안개에 쌓여 가물거리고 북쪽으로는 소안도와 노화도, 보길도, 그 너머 해남반도, 완도 본 섬까지도 손에 잡힐 듯합니다.
그러나 오늘 내가 굳이 동천다려 문까지 닫아두고 촬영팀을 쫓아 이곳 등대까지 온 것은 이런 아름다운 경치 때문이 아닙니다. 이 정도의 경치야 보길도에서도 드물지 않으니 그 때문이라면 굳이 발 품을 팔 까닭이 없었을 겁니다.

당사도 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9년 일제에 의해서였습니다.
당사도 등대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조선 침략의 앞길을 밝히기 위한 봉화대였던 셈이지요.
이 곳 당사도 등대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비석과 부서진 또 하나의 비석 잔해지요.
서 있는 비는 근자에 세워진 항일전적비이고 부서진 잔해는 일제에 의해 세워졌다가 해방과 함께 파괴된 조난 기념비입니다.

전투가 일어난 것은 등대가 세워진 바로 그해였습니다.
소안도의 동학혁명군 출신 이준화 선생을 비롯한 의병 6명은 1909년 1월 일제 침략의 전진 기지로 당사도 등대가 세워진 것에 격분하여 같은 해 2월 24일 당사도 등대를 습격, 일본인 등대 간수 4명을 사살하고 등대의 주요 시설물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었지요.

그후 1910년에 일제는 마적단에 의해 등대가 습격 받아 등대 간수가 피살되었다는 내용의 '조난 기념비'라는 것을 세웠습니다. 때로 역사적 진실과 기록 사이에는 이렇듯 터무니 없는 간격이 놓여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만년쯤은 거뜬할 것 같던 그 비석도 일제 패망과 함께 당사도 주민들에 의해 파괴되어 절구통으로 만들어지고 말았지요. 지금 그 절구통은 마을 이장님댁 마당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항일 전적비가 세워지게 된 것은 일제의 비석이 박살난 뒤로부터 50년도 더 지난 1997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어느 한 구석 할 것 없이 우리 역사의 발전이란 이다지도 더디기만 합니다.
하긴 아직껏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권력의 중심에 앉아 호가호위하는 판국이니 이 땅에서 그나마 항일 전적비라는 것이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만도 기적이라면 기적일 수 있겠지요.

당사도 등대 습격 전투이후로도 동학혁명 때 혁명군의 군사 훈련장이었던 소안도를 비롯한 이 일대의 섬들에서는 항일의병운동과 민족해방운동, 인간해방운동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 왔습니다.
섬 사람들은 애기 장수가 죽고 수 백년이 지나도록 애기 장수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제주도도 차츰 그 형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나의 여행은 계속 되는 법이 없습니다.
나는 다시 떠나오기 위해 돌아가는 걸까요.
당사도 등대를 뒤로 하고 우리는 이장님의 고무 보트에 몸을 싣습니다.
당사리 선착장에 잠시 들러 짐을 챙기고 이제 고무 보트에서 바다 가운데 닻을 내리고 있는 어선으로 옮겨 탄 다음 보길도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고무보트가 당사도 선착장을 떠납니다.

고무보트가 어선에 근접하려는데 이장님이 갑자기 옮겨 타지 말고 그냥 보트로 보길도까지 내쳐 가자며 속도를 냅니다.
아차, 내 우산, 올 때 가져가야지 생각하고 배에다 그냥 두고 내렸던 우산. 어째서 나는 올 때 타고 온 배를 갈 때도 타고 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일까요.
이장님, 내 우산이요, 말이 혀끝까지 튀어나왔다가 다시 감겨 들어갑니다.
어느새 비는 그치고 햇빛이 나고 있지 않은가.
비가 그쳤는데도 굳이 우산을 챙겨가야 할 이유란 무엇인가.
나는 늘 너무 많은 짐을 지고 다니는데 오늘 모처럼 하나를 내려놓고 갑니다.
고무보트가 점 복(卜)자를 날려보낼 듯 복생도 쪽으로 경쾌하게 날아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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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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