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편지> 한 여자 이야기

등록 2001.07.23 04:19수정 2001.07.24 11:15
0
원고료로 응원
"너무 늦은 시간인데 차 마시러 가도 될까요."
그때가 밤 10시쯤이나 됐을까, 여자의 목소리에서 고단함이 묻어났습니다. 그것은 한 생의 바닥에서 울려오는 소리였고, 나 역시 고단했으나 거절할 수 없었지요.
여자는 전화가 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뒤에야 찾아왔습니다.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천장과 마루 바닥, 기둥까지도 비틀거립니다.
"죄송해요. 밤늦게. 많이 망설였어요. 식당 일이나 하는 여자가 술까지 취해서 차 마시러 오면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실까 봐서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주저하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엽니다.
"이 생활 시작한 지 이제 1년밖에 안됐어요. 여기 오기 전에는 보성에 있었지요. 보길도에 온 지는 일주일 됐구요. 섬이라 솔직히 겁도 나고 그랬었는데, 괜찮네요."

다방이나 식당을 막론하고 직업 소개소를 통해서 오는 여자들에게는 아직도 섬은 두려운 곳이라는 뜻일까.
"의외로 거칠지 않더라구요. 사람들이 참 순박해서 좋아요. 아이들 생각도 나고, 마음도 심란해서 한 잔 했지요. 술을 마시고 싶었어요.
마시자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같이 마시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혼자 마셨어요, 죄송해요. 다음에는 맨 정신으로 차를 마시러 오고 싶어요"

찻물이 식어가고, 나는 물을 다시 끓여 내옵니다.
"한 달 계약으로 왔는데, 올 때는 식당에만 있다가 계약 기간 끝나면 배타고 바로 떠나야지 했지요. 그런데 제가 이 곳에도 다 왔네요. 술기운 때문이에요."
그러고 보니 나는 꽤 오랫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술병이 난 탓도 탓이겠지만, 나에게서 차츰 술기운을 빌리고 싶을 만큼 절실한 무언가가 증발해 가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 나는 벌써 이곳 생활에 안주하기 시작한 것인가.

"어제 슈퍼에서 선생님 책을 발견하고 책을 사서 읽었어요. 떠나기 전에 한번 꼭 찾아가 봐야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찍 왔네요.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더 올 수 있을까요."
떠나기 전이라, 떠날 기약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가. 나는 과연 이 섬을 떠날 수 있을까. 떠나왔으므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나. 갑자기 막막해집니다.

"이게 무슨 차죠. 아 참 세작이라 했지. 취해서 무슨 맛인지 모르겠네. 보성에 있을 때 아주 좋은 차를 사 가지고 왔는데 좋은 물이 없어서 수돗물로 마시는 것이 속상해요. 다기도 가지고 다니거든요."
여자는 다기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합니다.


"어느 때 한가한 시간이 나면 와서 차도 마시고 편안히 쉬었다 갔으면 좋겠네요. 근데, 이런 말 누구한테 못해요. 식당에서 일하는 여자가 별 생각을 다 한다고 이상한 여자 취급받을까 봐서요. 손님들이 없을 때 책을 보고 있으면 수근거리더라구요. '새로 온 여자가 책을 보네.' 하지만 저는 책을 좋아해요."
여자는 다탁에 놓인 책들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잇습니다.

"사실은 대학도 국문과에 가고 싶었는데. 오빠가 그러더라구요. 제가 막낸데. 고향은 서산이구요. '막내야, 거기 나와서 뭐 할래'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데요. 그래서 전산학과를 갔지요. 그때가 80년대 초였으니까. 한참 잘 나가던 과였죠. 지금은 후회스러워요. 어차피 졸업하자마자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쓸데없는 공부가 됐으니까요. 그럴 줄 알았으면 하고 싶은 공부나 할 걸"


"근데 전산학과를 나왔지만 컴퓨터는 잘 몰라요. 그때는 '애플'을 배웠었거든요. 중3인 딸이 엄마는 전산학과를 나왔으면서 컴퓨터도 잘 못해요, 할 때는 딸에게 너무 미안한 거 있죠."
중3인 딸과 초등학교 3학년인 여자의 아들은 서울에 있다고 합니다.

"대학 때부터 그렇게 오고 싶었던 보길도를 이렇게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돈 때문에 식당 일 하러 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냥 여행 온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보길도도 그렇지만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이 것은 돈 때문이 아니야. 여행 다니는 거야, 생각하려 해보거든요. 근데 그게 그렇게 되지가 않더라구요. 자존심도 많이 상해요. 나도 배울 만큼 배우고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여자는 술을 제법 마신 듯한데, 흐느끼지는 않습니다. 자신의 삶이 신파가 되지 않게 절제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겠죠. 다음에 쓰실 책에다가는 그런 여자도 있었다고 기억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여자는 어쩌다 이 먼 섬까지 흘러들어 온 것일까. 나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제 장마가 끝나면 보길도에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오고, 여자가 일하는 식당도 바빠지겠지요. 이 여름 여자는 식당에서 일하며 여행온 친구나 후배를 우연히 만나고, 혹여 가족들과 피서온 옛적 연인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밤이 깊어갑니다. 여자가 휘청거리며 밤 고개를 넘어서 돌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2. 2 한동훈 표정 묻자 "해가 져서...", 이어진 기자들의 탄성 한동훈 표정 묻자 "해가 져서...", 이어진 기자들의 탄성
  3. 3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4. 4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나무 500그루 가지치기, 이후 벌어진 끔찍한 일
  5. 5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단독] 명태균 "검찰 조사 삐딱하면 여사 '공적대화' 다 풀어 끝내야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