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를 따다

강제윤의 <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

등록 2001.11.14 14:07수정 2001.11.1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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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한나절 유자를 땄습니다.
돈방골 옛 집터의 유자나무 한 그루에서 두 상자의 유자가 나왔습니다.
지게에 한 짐 가득 지고 온 유자를 한 상자는 인천 부모님께 보내 드릴 요량으로 놓아두고 나머지는 물에 씻어 말리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나무를 심지도 않고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아둔하게도 열매를 얻고서야 나는 나무 심는 뜻을 알아챕니다.
이 십 년 전 할아버지는 유자나무를 심으셨지요.
살아 생전 할아버지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셨지만 살아남은 나는 한 그루의 유자나무에서 수 백 개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나무를 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한 시절 이곳의 유자나무는 제주도의 밀감나무처럼 효자 나무였습니다.
유자나무 몇 그루면 대학생 자녀 학자금을 마련하고도 부족함이 없다 했습니다.
지금은 산밭마다 유자나무가 지천이지만 누구도 돌보지 않습니다.
더 이상 돈이 되지 못하는 애물, 더러는 잘리고 더러는 무성한 잡초 밭에 버려져 있습니다.

복숭아가 그렇고, 사과가 그렇고, 단감이 그렇고, 유자가 또 그렇게 잘 키워져 거둘만 하면 이내 베어 넘어지길 반복합니다.
먹거리만을 위해서라면 단지 한 그루의 과실나무로도 열매는 넘치고 남는 것을.
이제 나는 상품으로 팔기 위해 과실나무를 심지는 않겠습니다.
돌담가에 씻어 널어둔 유자의 노란빛이 곱습니다.
물기가 빠지면 내일은 유자차를 담가야겠습니다.

종일토록 늦가을 볕이 너무 좋더니 저물녘이 되자 한기가 몰려듭니다.
오랫만에 군불을 때고 들어왔습니다.
조금 땠을 뿐인데 방안이 훈훈하고 바닥은 절절 끓습니다.
이제 다시 따뜻함이 그리운 시절이 온 것이지요.

지난번 도치미끝에서 주어다 말려둔 도토리로 묵을 쑤었습니다.
도토리묵에 맑은 소주 한잔을 마십니다.
곱게 갈아지지 않아 조금은 거칠고 떫지만 직접 만들어 먹는 가을 밤 도토리묵의 맛은 어디 비할 데가 없습니다.
이곳의 산에는 다람쥐들이 살지 않습니다.
다람쥐가 주어가지 않으니 내가 도토리를 거두어 한때의 식량으로 삼습니다.

어느새 정자 옆 키 큰 멀구슬 나무의 열매들도 잘 익었습니다.
여기 말로는 모꼬시 나무라 하지요.
대추와 비슷하지만 단맛이 부족하고 떫어서 사람들이 따먹진 않습니다.
새들도 지금은 달고 맛난 홍시 감이나 산 과일들을 찾아다니느라 모꼬시 열매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한 시절이 오면 모꼬시 나무는 먹이를 찾아 떼로 몰려온 삔추들로 장관을 이루게 됩니다.
한꺼번에 삼사십 마리는 족히 될 새들이 몰려와 열매를 따먹느라 떠들썩하지요.
녀석들은 내가 소리를 질러도 들은 척도 않습니다.
나도 실상은 녀석들에게 별 관심이 없으면서 주인장이라고 괜히 거드름 한번 피워 보는 것이지요.
가을은 이렇듯 새나 사람이나 차별 없이 고루 넉넉함을 나눠줍니다.
유자 향기에 취하고 소주에 취해 늦가을 밤이 깊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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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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