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염소 해산기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2.03.25 10:43수정 2002.03.2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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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제윤

길구야, 길구야,
채전을 일구고 있는데 마을 할머니 한 분이 세연정 쪽에서 뛰어오며 급하게 불러댑니다.
무슨 일일까.
괜히 마음이 덜컥합니다.
들어올렸던 괭이를 내려놓고, 나도 세연정 방향으로 뛰어 갑니다.

먼 일이다우.
길구야 언능 와바라. 언능.
새끼 났어. 넷이나 났어.


이런, 세연지 옆 풀밭에 매둔 우리 염소가 새낄 낳았나 봅니다.
진돗개 봉순이에게 물려서 사경을 헤매던 염소가 살아서 새끼까지 낳았습니다.
언능 수건 갖고 가봐. 감주순도 한 꾸러미 갖고.
알았소잉.
나는 급한 마음에 냅다 뛰어 염소에게 갑니다.

세연지 연못가 풀밭에는 여행 왔다가 진귀한 구경을 하게 된 사람들 몇몇이 염소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보건 소장 김창업 선생도 인사를 합니다.
김 선생은 봉순이한테 물린 어미 염소에게 주사를 놔주고 약도 챙겨주었던 고마운 사람입니다.

어쩐 일이오. 나도 반갑게 인사를 건넵니다.
김 선생은 마침 친구들이 놀러 와서 세연정엘 들렀다가 우연히 염소의 출산을 보게 됐다합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숨들간의 인연은 이렇듯 질기기만 합니다.

나는 뒤따라 온 아내가 건네준 수건을 받아 들고 새끼들 몸을 닦아줍니다.
맨 나중에 나온 놈인 듯, 한 녀석의 몸이 아직 흠뻑 젖어 있습니다.
녀석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덜덜 떨고 있습니다.
다른 녀석들은 일어서서 어미젖을 물고 있거나 벌써 띠엄 띠엄 걸음을 연습합니다.

나는 녀석의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고 어미 곁으로 데려가 젖에다
입을 대줍니다.
녀석은 젖을 물 생각을 않습니다.
몸집도 가장 작고 아직 일어서지도 못하는 것이 젖까지 먹을 줄 모르니 어째 불안스럽습니다.


"우유를 사다 먹이세요."
"분유를 사다 먹이세요."
"아니에요, 초유를 먹어야 저항력이 생겨요. 젖을 짜서 젖병에다 담아 먹이세요."

지켜보던 사람들이 걱정되는지 한 마디씩 거들어 줍니다.
허기진 어미는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풀을 뜯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아내가 풀들을 더 뜯어다 주자 염소는 허겁지겁 풀을 받아먹습니다.
막내 녀석은 여전히 일어서지 못하고 엎어져 떨고만 있습니다.


ⓒ 강제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아내도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염소들 곁에 주저앉아 지켜봅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교회 옆 논둑 길로 가서 풀을 한아름 뜯어옵니다.
풀을 던져 주자 염소는 털썩 풀 더미에 주저앉고 맙니다.
긴장이 풀린 탓일까요.
어미는 앉아서 풀을 뜯기 시작합니다.

느리게 풀을 뜯는 어미 배에 기대 새끼들은 깜빡 잠에 빠져듭니다.
따뜻한 봄 햇볕에 나도 앉은 채로 졸음에 빠져들다 어떤 기척에 눈을 뜹니다.
막내 녀석이 주춤거리더니 마침내 일어섰습니다.
어미젖을 찾아가는 녀석을 보니 이제 아주 살았다 싶습니다.

풀을 뜯을 만큼 뜯어 다시 기력을 되찾은 어미도 일어나 뒤에 힘을 줍니다.
아직 덜 나온 놈이 있나.
염소는 뒤에 걸려 대롱거리던 새끼보를 다 쏟아 냅니다.
새끼들을 담아 키우던 막. 염소가 그 질긴 막을 씹어 먹기 시작합니다.

육식의 개들이나 먹는 줄 알았는데 초식인 염소도 제 속에서 나온 살덩어리들을 남김 없이 먹어 치웁니다.
그 모질고 질긴 생명을 키우던 것들, 풀만 뜯던 이빨로 그 육질의 것들을 잘도 씹어 삼킵니다.
어미는 새끼보를 씹고 있고, 그 새끼보에서 금방 빠져 나온 어린 것들은 어미젖을 물고 있습니다.

새끼보만이 아니라 주변에 흘린 핏덩이까지 해산의 흔적들을 말끔히 먹어치운 어미가 새끼들을 핥아줍니다.
나는 수고했다고 어미의 등을 토닥입니다.
염소는 괜찮다고, 걱정해줘서 고맙다고, 다가와 내 손등을 핥아 줍니다.

이제 막 새끼를 넷씩이나 낳은 염소지만
어디에도 방금 해산을 한 산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과는 달리 염소나 개 등, 다른 동물들에게는 새끼를 낳는 일이 그다지 고통스럽거나 유별난 의식이 아닌 듯합니다.
태초에는 사람도 저러지 않았을까.

열매를 따고, 뿌리를 캐다가 들에서 산에서 아이를 낳고, 혼자 탯줄을 끊고, 제 속에서 나온 애기보를 먹어 치우고, 제 혀로 아이 몸에 묻은 피를 핥아서 씻겨주고, 아이를 풀밭에 풀어두고, 다시 흔연스럽게 열매를 따지 않았을까.
아이들 또한 방금 태어나 일어서는 염소처럼, 엉금엉금 기다가 이내 혼자 일어나 걸어 다니지 않았을까.

ⓒ 강제윤

어미 곁에서 한 잠 자고 일어난 새끼들이 다시 뒤뚱거리며 풀밭을 걸어 다닙니다.
하루 이틀만 더 지나면 뛰어 다니겠지요.
저 이쁘고, 앙증맞고, 귀여운 어린 염소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저 어린 것들의 운명은 비극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염소새끼들의 태어남을 슬퍼할 까닭은 없습니다.
어린 염소들은 곧 자라나 살찌워지면 팔려가 죽게 되겠지요.
하지만 저 식용의 염소나 개뿐만 아니라 그들을 먹는 사람까지도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되는 것을, 죽음이 예견된다고 새 생명의 탄생까지 애달파 할 일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운명의 행로가 정해져 있던 간에 모든 생명은 태어나는 순간 축복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곧 죽을 목숨일지라도 목숨은 존귀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소망할 뿐입니다.
저 어린 염소들이 비록 가마솥에 들어갈 운명을 지고 태어났을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학대받지 않기를, 고통받지 않기를, 존중받기를.

풀을 뜯던 염소가 졸리운지 하품을 합니다.
나른하겠지요.
무거운 뱃속도 비웠겠다, 풀들도 배불리 먹었겠다, 바람은 부드럽겠다, 봄 햇살은 따숩겠다, 염소 곁에 앉아 있던 나도 나른하여 졸음을 참지 못하고 이내 풀밭에 드러눕고 맙니다.
꿈결엔 듯 어린 염소들이 내 품으로 와 함께 잠에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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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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