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벗들, 고향으로 돌아오라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2.07.15 11:00수정 2002.07.1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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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집터를 개간한 밭둑에 주저앉아 차나무를 심습니다.
담 너머 정복이 형님네 집 부근에서 귀에 익은 말소리 들려 옵니다.
학철이 형님이 앞서고 상일이 형님이 뒤 따라 담 안으로 들어섭니다.

"여그 있는 줄 알았네."
학철이 형님이 말을 건넵니다.
"어짠 일이요."
"집에 갔다가 동상이 없어서 여그로 왔네. 비 와서 찌럭찌럭 한데 일항가."
"찌럭찌럭 해도 어짜것소, 땅 촉촉할 때 싱게 부러야지라우."
"우게는 짤라버리고 싱기라든디."
"그라고 있소."


학철이 형님과 상일이 형님은 오전 내 전복 밥으로 쓸 다시마를 베러
바다에 갔었다고 합니다.
바다에서 돌아와 술이나 한잔 함께 할 요량으로 집에 들렀던 모양입니다.

실은 이 묘목도 학철이 형님 덕분에 이렇게 빨리 심고 있지요.
그저께 마침 볼일이 있어 구례엘 간다는 학철이 형님에게 부탁해서 묘목을 사왔습니다.

묘목을 땅에 묻어 놨다가 비가 오자 심으러 왔지요.
이런 저런 일로 늘상 학철이 형님이나 상일이 형님에게 도움만 받고 살아갑니다.

두 분 형님은 닭을 잡아놓고 기다릴 테니 어서 끝내고 오라며, 뒷집에서 토종닭을 한 마리 사들고 내려갑니다.
형님들은 '언능 심고 내려 오라'고 했지만 나는 언능 심을 뜻이 없습니다.

흙바닥에 편안히 주저앉아 나무를 심어갑니다.
젊어서의 시골 생활이란 일하는 동안마저도 이렇듯 한가롭습니다.
만일 내가 늙어서 귀향했다면 나무 심는 시간이 지금처럼 한가로울 수는 없었겠지요.


내가 고향 보길도를 떠난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나는 뭍으로 돈벌러 나간 부모님과 헤어져 세 살 때부터 조부모님 밑에서 자랐습니다.
산과 들, 바닷가를 뛰어다니며 자유롭게 살았지요.
당시 나는 고향을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린 나보다 힘센 아버지에게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도회지에 살면서도 영혼은 늘 고향에 있었습니다.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리란 말을 되뇌이며 낯선 날들을 견뎠습니다.
그렇게 20여년을 떠돌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5년이 흘렀습니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 누군들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워하면서도 선뜻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뿐이지요.

모두가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고향마을, 빈 집들, 빈 들판들.
이제 하나둘 노인들마저 이승을 떠나고 나면 텅 빈 고향도 아주 사라지고 말 테지요.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들로 인해 고향은 아프고 서럽습니다.

고향을 떠나간 어머니, 아버지들, 딸들, 아들들, 이제는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떠났던 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누가 돌아와 빈집과 들판을 다시 채울 수 있겠습니까.
차마 등지고 떠나며 돌아오마 던 약속을 이제는 지켜야 할 때입니다.
더 늦기 전에, 더 늙어지기 전에.

더구나 젊은 벗들, 그대들 만약 늙어져서 돌아온다면 그대 자신을 위해 혹은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고향은 실버타운이 아닌 것을.

세상으로 던져지는 모든 말은 주술사의 주문과 같습니다.
희망의 말을 주문 하면 희망이 현실이 되고, 절망의 말을 주문하면 절망이 현실이 됩니다.
나는 고향 땅에 나무를 심으며 나무들에게 희망의 말을 건넵니다.

마침내 돌아오고 말 거야. 다들 고향으로 돌아 올 거야.
나의 말이 실현되어 내가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이 말 또한 오래지 않아 현실로 이루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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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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