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장작불과 같아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2.08.05 09:58수정 2002.08.06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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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불을 끄고 자려는데 봉순이네 식구들이 요란하게 짖기 시작합니다.
술에 잔뜩 취한 친구가 찾아 왔습니다.
뭍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는 고향에 온 김에 계모임에 참가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렀다고 합니다.
벌써 새벽 1시가 넘어 갑니다.
나는 차를 끓여 친구에게 잔을 건넵니다.

"외롭게 사는구나"
친구가 불쑥 말을 던집니다.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친구를 봅니다.
"네 욕을 많이 하더라."
"제깟 놈이 언제 들어왔다고, 마을 발전을 방해했다고."


언뜻 짐작되는 바가 있어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옵니다.
개새끼.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돼, 너도 여기 놈이 아니잖느냐."

혼자 살기는 쉽습니다.
함께 살기는 진실로 어렵습니다.
벌써 1년도 더 지난 일인데 아직까지도 내가 없는데서 욕을 하고 다닌다니 벌컥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장마철 한때를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물도 흐르지 않는 건천인 보길도의 하천을 전라남도에서 '수해 상습지구'로 지정해, 40억짜리 공사를 강행하려는 것을 내가 나서서 반대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습니다.

다른 시급한 사업도 많을 텐데, 3킬로밖에 안 되는 섬의 하천 보수 공사에 그토록 막대한 예산이 배정된 정치적 맥락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면장이 하천 보수 공사비로 3억원의 예산을 신청했지만, 도의원은 자신이 그것을 40억짜리 큰 공사로 만들어 왔다고 자랑을 했었지요.

아무튼 하천의 폭이 현재도 20미터 이상은 족히 되는데 폭을 40미터로 확장해서 호안 블럭으로 제방을 쌓겠다니.
공사비도 터무니없고, 물도 흐르지 않는 하천의 폭이 그렇게 넓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굳이 오래된 나무와 바위들을 파헤치고 바닥을 허연 시멘트로 발라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위험한 부분만 자연석을 이용해서 보수하면 되지 않는가.
환경보호니 뭐니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저 평범한 상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었지요.


한동안 어려운 싸움의 과정을 거처 결국은 공사를 전면 수정시켰습니다.
공사구간도 500미터로 단축시켰고 예산도 절반 이상 삭감했으며, 제방은 호안 블럭이 아니라 자연석을 이용해서 쌓기로 했지요.
지금은 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그렇게 일이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때 공사를 적극적으로 찬성했던 몇몇 사람은 나에게 앙금이 남았던 것이지요.
아직까지도 나 때문에 마을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욕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요.


내 욕을 하던 그가 진실로 마을에 대한 애정으로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심이 있었던 때문인지 나는 알 길이 없습니다.
친구는 돌아가고, 나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지 못해 마당을 서성입니다.

'분노는 장작불과 같아 남을 태우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태우게 된다' 하거늘 터무니없는 상황에 처하면 나는 늘 화부터 내고 맙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서재로 돌아와 경전을 펼칩니다.

어느 날 부처는 무뢰배로부터 욕설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무뢰배는 부처를 때리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때야 부처는 입을 열어 무뢰배에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선물을 주려고 하는데 상대가 거절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면 내가 다시 갖겠다." 무뢰배가 대답했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나에게 욕을 했는데,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욕은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그때야 무뢰배는 얼굴을 붉히며 도망갔습니다.

나는 좋은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합니다.
한 여름, 불면의 밤이 깊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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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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