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팔이 소녀의 재림'과 한류

노순택의 <자전거가 있는 풍경 10>

등록 2002.09.30 01:17수정 2002.10.04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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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요즘 우리 영화동네는 111억원이라는 큰돈을 들여 만든 장선우 감독의 영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 관객들을 끌어 모으지 못해 뒤숭숭하다죠. '액션 신비극'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온 이 영화가 어떤 장르적 실험을 하나 궁금했는데 관객들은 좀처럼 신비스러움을 느끼지 못했나 봅니다.


이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으려면 400만명의 관객이 스크린 앞에 앉아야 한다는데, 아직까지 14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치고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군요.

대신 기분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가 59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받은 데 이어,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가 외국 영화수입업자들의 호평 속에서 파라마운트 등의 대형배급사를 통해 미국 등지에서 개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또 영화배우 박중훈 씨는 <필라델피아> <양들의 침묵> 등의 영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조너던 드미 감독의 <찰리에 관한 진실>에 출연, 2년여의 작업 끝에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군요.

암튼 근 몇 년 사이에 영화를 위시한 한국의 대중문화가 양적으로 또 질적으로 큰 성장을 이룬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합니다.


중국의 '한류' 열풍도 이러한 한국 대중문화의 성장과 궤를 같이 했습니다.

이미 귀에 익어 매우 오래 전부터의 일 듯하나, 3년 정도 됐을 뿐이지요. 다만 그 열기는 뜨겁게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드라마의 인기는 압도적입니다.


1997년 중국의 CCTV가 <사랑이 뭐길래>를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목욕탕집 남자들> <이브의 모든 것> 등이 잇따라 중국인민들의 안방극장을 찾은 데 이어, <별은 내 가슴에> <가을동화> <겨울연가> 등이 인기폭발하면서 사실상 안방극장을 평정했습니다. 요즘은 한국 드라마의 80% 가량이 중국에 공급된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죠.

배우 김희선과 안재욱 씨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만, 우리에게 배우로 친숙한 안재욱 씨가 중국에선 가수로 더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어쩐지' 어색합니다). 광고 출연도 잇따르고 있어 김희선 씨가 중국 최대 종합가전회사인 TCL의 휴대전화와, 안재욱 씨가 샴푸 페이거, Boss 양복 등과 손을 잡았습니다. 요즘은 <가을동화>의 송혜교 씨 인기가 만만찮다고 합니다.

이런 바람을 타고 가요와 영화 등도 빠르게 중국 시장에 진출했습니다. 특히 DVD가 대중화되면서 한국영화 보기가 아주 쉬워졌고, 이런 한국 대중문화의 대량보급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한쭈'(한국팬)가 됐습니다.

그렇다고 '한류'의 미래가 밝기만 한 것일까요? 중국 정부가 단속에 나선다고는 하지만, DVD 시장은 정품 시장보다 해적판 시장의 규모가 더 커 판로를 개척하기 쉽지 않고, 중국의 시장구매력이 커지면서 '선정적 스토리라인과 예쁜 얼굴로 승부하는' 한국대중문화에 대한 환호도 차츰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전기, 전자 분야의 한국 제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비단 중국 것보다 좋아서일 뿐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 등의 제품보다 가격이 싸기 때문이며, 한국 대중문화 역시 상대적으로 싼 로열티에 힘입은 경쟁력에 기인한 바가 크다는 게 냉엄한 현실이니까요.

중국의 빠른 성장추이를 지켜볼 때, 한류가 시답잖아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사진은 베이징 외곽의 택시 승강장 앞.

한류의 상징같은 인물인 배우 김희선 씨가 광고판 안에서 TCL의 휴대전화를 사라고 손짓하는군요. 그 앞으로 짐 자전거가 쓰윽!

(중국에 진출한 한국의 대중문화가 지금의 수준을 답보하는 데 그친다면 저 광고판의 김희선 씨는 어쩌면 중국인들에게 '떠들썩했던 휴대폰팔이 소녀의 재림과 사라짐'으로 기억되지는 않을까 몰라요. 억측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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