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나의 조부님, 왕곰

<강제윤의 보길도 편지>

등록 2002.12.16 12:18수정 2002.12.16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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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1

늙는 것이 서러운 것은 아니다
노인은 식어 가는 방이 두려웠다
노인은 버릇처럼 다 타지 않은 연탄을 갈았다
새벽 세시
잠자던 고양이가
노인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진다
노인은 잠들 수 없다
잠들면
누가 깨우러 올까
밤마다 문 두드리는 소리
부르는 소리
창문을 열어보지만
마당에 연탄재만 가득하다
기웃거리다 그는 돌아가는 걸까
벌써 몇 년째
노인은 그를 기다렸다
그가 다녀가면
타다만 연탄처럼 노인도 마당에 버려질 것이다
새벽 세시, 연탄을 갈고
노인은 개밥을 불에 올린다




왕곰

그가 떠났다 곰이라 불리던 나의 조부
하룻밤을 영안실에서 지새우고 난 아침
전설처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세상은 고요하기만 한데
차가운 냉동실에 누워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서 일어나야 고향에 내려갈텐데 올 봄에는
아부지 묏등에 개사토를 해야 하는데
꼼짝도 할 수 없는 육신, 안타까움에 가슴저리고 있을까
고단한 이승을 하직하고 건너온 새벽
고향바다의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그는 이미
선산을 찾아 조상님들을 만나고 먼저 묻힌 고향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살아 생전 이웃의 어려움 단 한 번도 지나친 적 없으니
궂은 일마다 앞장섰으니 대가를 바라지 않았으니
곰이라 불렸으니
왕곰이라 불렸으니
우리 조부
그 쓸쓸함을 누가 알기나 할까
나는 왕곰이 그리워 이렇게 달려 왔는데
그는 이미 떠나고
적막한 영안실
조부 인자 그만 일어 나씨요
흔들어 깨우면 일어나 손 붙들고 우리 길구 왔구나
이 곳은 너무 춥구나
얼어죽는 줄 알았어 반가움에
서러운 눈물 왈칵 쏟으실 것도 같은데
그는 이미 떠나고 나는 왕곰이 그리워 떠나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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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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