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 앞 외돌괴 바위, 애잔한 부부애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박도
사랑으로 건너갔더니 깨끔한 모시 두루마기 차림에 단정히 갓을 쓴 어른이 외삼촌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외삼촌은 그분이 둘째 이모부라면서 큰절을 올리라고 했다.
외가에서는 그 이모부가 마들이 마을에 산다고‘마들이 이 서방’이라고 불렀다. 장모님 생신에 다른 사위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오지 않았는데도 마들이 이모부만 온 것이다.
나는 외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에게 물었다.
"왜 마들이 이모는 외할머니를 닮지 않았어요?"
“그 이모는 엄마의 친언니가 아니다.”
어머니는 이모부 내외의 내력을 들려주었다. 어머니의 둘째 언니가 마들이 마을로 시집 간 지 일년만에 돌아가셨다. 그 후 이모부는 다시 장가를 갔는데, 그 부인이 지금의 마들이 이모로, 이런 경우 외가에서는‘움딸’이라고 한다 했다.
나는 그 후로도 마들이 이모부 내외를 여러 차례 뵈었다. 외가의 대소사에는 거의 거르지 않았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대소 상에는 빠지지 않았고, 탈상 전날 저녁 제사 때는 이모부 내외가 손수 제물을 마련해 와서 제문까지 지어 바쳤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당신의 친부모도 아니면서, 전처의 부모상에 그런 봉양을 한다는 일이 좀체 드문 일로 두고두고 두 분의 아름다운 모습이 내 뇌리에 남아 있다.
그 후 들은 바, 나의 친이모가 젊은 나이로 돌아가실 때는 일제 시대라서 선산에 모시지 못하고 공동 묘지에 모셨다는데(그때는 법으로 공동 묘지 외에는 매장을 금했다고 함), 해방 후 당신 손으로 장의 절차를 죄다 갖춰 선산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마들이 이모부의 여러 얘기를 들을수록 그분의 사람됨과 전처에 대한 열부가(烈婦歌)도 거룩하지만, 그보다 전처 부모도 당신 부모처럼 섬기는 새 이모의 고운 마음씨가 내 마음을 울렸다.
그 이모부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하지만 지금도 외가마을에서는 그분에 대한 칭찬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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