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70

별은 지고 (5)

등록 2003.03.08 14:08수정 2003.03.0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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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틀이 지날 무렵 차꼬와 칼을 쓰고 있던 사면호협은 분노로 떨었다. 연화부인을 죽인 자가 바로 혈면귀수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평소 연화부인의 미모를 탐내던 그가 겁탈한 후 후환이 두려운지 목 졸라 죽였다는 것이다. 대덕사에 몸담고 있는 비구니가 이 장면을 목격하였으니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 사면호협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혈면귀수가 말하길 보타암에 있는 여식을 바치면 막대한 은자를 착복한 죄의 대가로 지옥갱으로 보내져야 하는데 이를 유예해 주겠다는 것이다. 혈면귀수는 손녀 같은 여옥혜마저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분노한 사면호협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에 혈면귀수는 어디 두고 보자면서 괴소를 머금은 채 한 동안 바라보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무슨 음모를 꾸미는 그런 얼굴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사면호협은 평소 아끼던 수하에게 서찰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억울함과 혈면귀수의 부당한 일 처리를 조목조목 적은 서찰이었다.

이것은 무천장의 부정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으로 세워진 순찰원(巡察院)으로 보내지게 될 것이다.

총단에서 조사가 나오면 혈면귀수를 거꾸러트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서찰은 순찰원으로 향하기 전에 혈면귀수의 손으로 들어갔다. 믿었던 수하마저 배반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면호협은 지옥갱으로 향하는 것으로 완전히 결정지어졌다. 그리고 조금 전 그것을 통보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지막한 신음을 토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혈면귀수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단전이 파괴되어 내공을 모두 잃었을 뿐만 아니라,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쇠사슬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 *

"하하! 하하하하! 다 되었다고? 좋아, 수고했다."

갱주의 칭찬에 이회옥은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달 전, 처음 대면한 말은 놀랍게도 태극목장에서나 볼 수 있던 순종 대완구였다.

사람들이 보기엔 다 자란 말인 듯 싶으나 살상 그것은 망아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보이는 것은 대완구의 특성 때문이었다.

보통 말에 비하여 체구가 월등히 컸던 것이다. 하긴 그렇기에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하하! 이런 재주가 있으니 말 도둑을 할 수 있었겠군."
"대인! 말 도둑이라니요? 소생은 말을 훔친 적이 없습니다."

"하하! 녀석, 말 도둑이 아니고서 어찌 이렇게 말을 잘 다룰 수 있단 말이냐?"
"아닙니다. 소생은 말을 훔친 적이 정말 없습니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우선은 한번 달려봐야겠다."

갱주가 한시바삐 달려봐야겠다는 듯 박차를 가하자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흑마가 쏜살처럼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회옥은 자신이 지난 한달 간 정성 들여 길들인 흑마가 질주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정말 오랜만에 짓는 미소였다.

지난 한 달은 그에게 있어 중요한 시간이었다. 어린 시절 배웠던 말 다루는 기술을 떠올리면서 부친과의 단란했던 시간들을 회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피거형에 처해졌던 자신이 구사일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지옥갱 유일의 말 도둑이기 때문이었다.

신임 갱주인 무림천자성 제일호법의 막내아들인 비천혈영(飛天血影) 조곽은 본시 총단 순찰원 소속이었다.

순찰원은 첩보가 있을 때마다 천하 각지로 나가게 되기에 하나같이 천리준구들을 배정 받았다. 그런 그가 이처럼 궁벽한 곳에 부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색(色) 때문이었다. 워낙 색을 밝히는 바람에 얼굴이 노랗게 변하자 여자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이곳으로 보낸 것이다.

평소 조곽은 천하에 보기 드문 명마를 원했다. 순찰원의 어느 누구보다도 빨리 달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말을 고를 때 가장 기(氣)가 세어 보이는 놈을 선택한 것이다.

제일호법의 총애를 받는 막내아들이었기에 선택한 망아지를 배정 받는 데까지는 아무런 어려움도 없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말을 다루는데 있어서 귀신과 같다는 철마당(鐵馬堂)의 그 어느 누구도 망아지를 조련해 내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명마라 할지라도 사람을 태우지 않으려 한다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

곁으로 보기에 망아지는 장차 천하제일 명마가 될 소지가 다분하였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길을 들여보려 하였으나 끝내 길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말을 버릴 수는 없었다.

규정상 한번 말이 배정되면 적어도 삼 년 동안은 새로운 말이 지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 없이 삼 년을 지낼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길을 들여야 하였다.

임지에 당도한 조곽은 혹시 지옥갱의 죄수 가운데 망아지를 조련해 낼 능력을 지닌 자가 있나 알아 보라 하였다. 그런데 죄수들 가운데 말과 관련된 죄수는 오로지 이회옥뿐이었다.

이제 불과 열여섯 살이라는 보고에 그만 둘까 하던 조곽은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였다. 망아지를 길들이면 좋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손해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여 피거형에 처해져 죽을 날만 기다리던 이회옥이 구사일생 한 것이다.

처음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먹이나 주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신을 속이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싶었던 조곽은 다시 피거형에 처하라고 명을 내리려 하였다. 그러던 중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철마당 소속 조련사라 하더라도 망아지 부근에는 거의 접근조차 못했는데 이회옥은 태연하게 말을 쓰다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한 게 오늘로서 한 달째였다.

"하하하! 아주 마음에 들었다. 수고했어! 수고했다고…"

한바탕 달리고 온 조곽은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입가에 걸린 환한 미소가 그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하! 너 같은 인재가 이런 곳에서 썩고 있으면 안 되지. 핫핫! 본좌가 너를 철마당으로 보내주마. 알겠지?"
"……?"

"핫핫! 무림천자성 총단에는 이놈 같은 천리준구들만 키우는 철마당이라는 곳이 있다. 아버님께 말씀드려 너를 특별히 철마당에 배속시켜줄 터이니 가서 일 잘하거라. 알겠지?"

조곽의 말을 듣는 순간 이회옥은 전신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전율이었던 것이다.

"그, 그럼 소, 소인을 풀어 주시는 겁니까?"
"핫핫핫! 그래. 네놈의 말 다루는 솜씨가 마음에 들어 특별히 너를 사면(赦免)해 주도록 청을 넣겠다. 대신 철마당에 가거든 본좌의 얼굴을 봐서라도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알겠느냐?"
"대, 대인! 저, 정말이십니까?"

이회옥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이던가! 한번 하옥되면 죽기 전에는 절대로 풀어주지 않는다는 지옥갱이다. 처음 죄수를 하옥시킨 이래 단 한 명도 사면해 준 적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풀어준다고 하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핫핫! 믿어지지 않느냐? 하하! 네놈을 특별히 사면한다고 했다. 알겠느냐? 핫핫! 가거든 정말 잘 해야 한다. 알겠지?"
"대, 대인! 감, 감사합니다."
"하하하! 하하하하! 자, 본좌는 한바탕 더 달려야겠다."

말을 마친 조곽은 쏜살같은 속도로 말을 몰았다. 그런 그의 입에서는 연신 앙천광소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핫핫핫! 하하하하!…"

며칠 후, 이회옥은 괴나리봇짐을 메고 황산 어귀를 내려서고 있었다. 정말 풀려난 것이다. 이것은 지옥갱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하! 녀석, 아직도 안 믿어지느냐?"
"예? 아, 예에…!"

이회옥은 정의수호대원의 말에 깊은 상념에 잠겨 있다가 깨어났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냉혈살마와 비접나한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옥거를 타고 와서 지옥갱에 하옥되고 탈출하다 잡힌 것 등등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곁에는 지옥갱에서 총단으로 되돌아가는 지옥거가 있고, 십팔 명에 달하는 정의수호대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옥거는 어제 죄수 하나를 호송해 왔다고 한다. 듣자하니 산해관 무천장 장주였던 자인데 직위를 이용하여 공금을 횡령하고, 양민들을 도탄에 빠지게 한 악질 중의 악질이라 하였다.

그는 지옥갱 가운에서도 가장 아래에 있는 팔열지옥갱이라는 곳으로 보내져 죽도록 노동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무림천자성과 관련 있던 자가 하옥될 경우에는 다른 죄수들과 섞어 놓으면 그 날로 죽기 때문이라 하였다. 조곽은 이회옥으로 하여금 총단으로 되돌아가는 지옥거의 행렬을 따라가라 하였다.

그래야 중간에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확실하게 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서찰 하나를 써 주었다. 그것에는 부친인 제일호법에게 전해주라는 것으로 말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므로 철마당에 배속시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하하! 녀석, 네놈의 성명 석 자는 아마도 사서(史書)에 남게 될 것이다. 지옥갱에서 풀려 나온 유일무이한 인물로… 하하!"
"……!"

이회옥은 어깨를 두드리는 묵직한 손길에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무림천자성이 어떤 곳이던가! 무림의 정의를 수호하는 그야말로 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인척 가운데 무림천자성에 몸담은 사람이 있으면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곤 하였다.

그렇기에 젊은이들은 누구나 천하를 누비며 정의를 수호하는 정의수호대원이 되기를 갈망하였고, 여인들은 누구나 그들의 반려자가 되기를 원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자신이 일약 무림천자성의, 그것도 무한에 있는 총단의 철마당 소속이 된다는 생각에 하늘을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던 것이다.

"하하! 이제 풀려났으니 사실대로 한번 말해봐라. 듣자하니 말을 훔친 죄로 하옥되었다고 들었는데 정말 훔치긴 훔친 거냐?"
"아니에요. 전 말을 훔친 적이 없어요."

"녀석, 너 혹시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라는 말을 하느냐?"
"이, 일사 부재리요…?"

"하하! 그래, 모르지? 일사부재리란 한번 죄를 물었으면 다시 그것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이야. 너는 이미 지옥갱에 하옥되었으니까 이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네가 말을 훔친 것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없다는 말이다."

"아, 아니에요. 저는 말을 훔친 적이 없어요. 정말이에요. 믿어 주세요. 저는 말을 훔친 게 아니라 억울하게…"
"하하! 알았다. 알았어. 녀석…!"

말을 마친 정의수호대원은 이회옥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의 모든 젊은이들이 부러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것은 다른 정의수호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총단으로 향하는 동안 그들이 보여준 태도 등은 그야말로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웬만하면 무림천자성 소속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거들먹거릴 것이나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어디를 가든 예(禮)를 갖추었고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은 먹지도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분쟁이 있는 곳에서는 그야말로 명명백백하게 시비를 가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이회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를 부러워한 적도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회옥의 머리 위로 전서구 하나가 날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조곽이 제일호법에게 보내는 전서구였다.

< 아버님 전상서.
기체후 일양만강하시온지요?
일기가 순탄치 못하여… < 중 략 >
전에 말씀드려 사면하셨던 이회옥은 말 다루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아직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없으니 중용하시되 신중을 기해 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립니다.
불효자 조곽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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