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86

무궁공자 이위소 (1)

등록 2003.03.26 14:04수정 2003.03.2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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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무궁공자 이위소

신동 중의 신동이 아니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는 무천서원에서 무궁공자 이위소가 거둔 성적은 역대 최고였다.


이곳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나이는 대부분 십 세 전후이다. 모두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아이들이다.

이곳에 들어가 학문을 닦으려면 시험을 치러야 하였다. 매년 한 차례씩 치러지는데 소문난 신동 삼천여 명 정도가 응시한다.

이 가운데 입원 자격이 부여되는 자의 수효는 불과 백여 명 정도이다. 다시 말해 신동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경쟁을 뚫지 못하면 발걸음조차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무천서원인 것이다.

그렇기에 일단 입원 허가를 받으면 가문의 영광이라며 떠들썩한 잔치를 벌이곤 하였다. 아무튼 무천서원에 발을 들여놓으면 이때부터 체계적으로 학문을 닦을 수 있게 된다.

이곳의 자랑거리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엄격한 훈장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학문에 통달한 거유(巨儒)들이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무천장경고(武天藏經庫)라는 것이다.

이곳에 없는 서책은 중원 어느 곳에도 없다는 말이 있듯 수백만 권에 달하는 서책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곳이다. 그곳에는 시문은 물론 각종 경전과 잡학, 심지어는 무공비급까지 있었다.


학동들은 이러한 서책들을 마음껏 볼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무천서원에 입원한 후 매 이 년마다 시험을 치른다. 그때마다 학동들 가운데 학업이 가장 뒤쳐지는 일 할을 도태시킨다.

입원할 때를 포함하여 모두 아홉 번의 시험을 치르면 더 이상의 시험은 없다. 따라서 마지막에 남는 인원은 불과 십 명뿐이다. 입원할 때의 인원에서 무려 구 할이나 탈락된 것이다.

이후에는 무림천자성의 요직에 앉아 그 동안 익힌 학문을 바탕으로 경륜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처음 입원할 때 무궁공자의 성적은 장원(壯元)이었다. 당시에 응시 인원은 삼천하고도 일곱 명이었다. 그들 하나 하나가 제 고향에서는 신동 소리를 듣던 아이들이었다.

그런 그들 모두를 제친 것이다. 당시 선무곡에서는 이위소의 장원 소식을 듣고 무려 보름 동안이나 잔치를 벌렸다고 한다.

이후 열두 살에 치러진 시험에서도 장원급제하였다. 열넷일 때도 그러했고, 열 여섯일 때도 그러했으며, 열여덟, 스물, 스물둘 모두 장원급제하였다. 무천서원이 생긴 이후 아홉 번의 시험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한 인물은 무궁공자 이위소뿐이다.

누구도 깰 수 없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의 외호에 무궁(無窮)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는 이유는 두뇌에 추측할 수 없을 정도로 무궁무진한 학문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무천서원의 모든 훈장들은 그의 앞에서만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비록 신분은 학동이었지만 실력 면에서는 천하의 어느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흔히들 중원제일이니, 고금제일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수식어로도 이위소의 학문을 나타내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비공식적이지만 지금도 무천서원에서는 이위소를 지칭할 때 무궁공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를 칭할 때에는 늘 옷깃을 정갈히 여민 후 영세제일학(永世第一學)이라 칭한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영원히 그의 학문을 능가할 자가 없다는 의미였다.

몇 번의 시험을 치르는 동안 무림천자성에서는 그를 주목하였기 시작하였다. 한 사람의 뛰어난 두뇌가 불리했던 전황(戰況)은 물론 국운(國運)까지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조조에게 뛰어난 두뇌가 없었다면 어찌 위(魏)를 건국할 수 있었으며, 유비에게 제갈공명(諸葛孔明)이라는 걸출한 책사(策士)가 없었다면 어찌 촉(蜀)을 건국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무림천자성은 새로운 기틀을 잡아가던 때였다. 그렇기에 뛰어난 두뇌를 지닌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하여 무사히 학업을 마친 이위소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약 무천서원의 훈장으로 발탁되었다가 얼마 후 원주로 승차(陞差: 진급)되었다.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훈장들을 거꾸로 거느리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하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누가 있어 감히 영세제일학과 학문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무궁공자는 고향인 선무곡으로 돌아왔다. 웬만하면 개선장군보다도 더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할법하였지만 선무곡은 조용하였다.

곡주를 비롯한 수뇌부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의 귀향(歸鄕)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선무곡에는 무림천자성에서 파견한 정의수호대원들이 주둔해 있었다. 그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북곡의 재침에서 남곡을 보호하기 위하여 주둔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였다. 정의수호대원들은 선무곡 사람들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하였다. 당연히 선무곡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였다.

그러다 보면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립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무림천자성은 몹시도 고압적인 자세로 곡주 등 수뇌부들을 윽박지르곤 하였다.

자신들이 돌아가면 선무곡은 즉각 북곡의 밥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여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던 선무곡으로서는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그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것이 몹시 못마땅했던 곡주가 은밀히 이위소를 불러들인 것이다. 무림천자성과 화존궁, 그리고 일월마교 등 극히 일부 문파만이 가지고 있는 천뢰탄과 버금갈 비밀 병기를 개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천자성으로부터 즉각적인 반응과 더불어 보복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기에 아무도 모르게 부른 것이다.

사실 이위소로서는 곡주의 명에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무천서원의 원주는 웬만한 무림 문파의 장문인보다 월등히 높은 지위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돌아온 것은 곡주가 보낸 밀사의 간곡한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조들의 뼈가 묻혀 있는 고향을 위하여 지니고 있던 모든 지위를 버리고 돌아온 것이다.

무궁공자의 품에는 천뢰탄 제조 비법이 있었다. 무천장경고에서 그것을 만들 수 있는 기본 원리를 깨우쳤기에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이것을 본 곡주는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당시의 곡주는 곡주가 된 이후 그야말로 철권통치를 하였다. 그렇기에 곡내에 적지 않은 반발 세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곡주는 철심냉혈(鐵心冷血)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곡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설사 수많은 제자들의 목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재가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눈에서 눈물이 나온 것이다.

곡주는 장차 북곡을 흡수 통합하겠다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서 무림의 거대방파가 되는 것을 꿈꿨다. 무림천자성의 농간에 휘말리지 않고 자의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능력을 지닌 방파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던 것이다.

영세제일학인 이위소가 왔기에 이제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목전에 도달하였다 생각하였기에 눈물 흘린 것이다.

이위소는 즉각 천뢰탄 제조를 위해 특별히 만든 비밀 기관 내로 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무궁공자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절벽 위에서 바람이라도 쏘이다가 실족하는 바람에 떨어져 죽은 것으로 보였다. 하여 세상에는 실족사(失足死)라고 발표되었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천뢰탄 제조를 위한 비밀 동혈에 있어야 할 그는 절벽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바람을 쏘이기 위함이라면 굳이 위험해 보이는 절벽이 아니더라도 되었다. 선무곡은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며 산책하기 좋은 곳이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무곡이 생긴 이래 그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곳의 특이한 환경 때문 때문이었다.

세상에 환멸을 느껴 자진(自盡)하기 위해서 그곳에 올랐던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내려왔다.

작은 들짐승조차 지나치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돋아 있는 가시넝쿨들 때문이었다. 그곳을 헤치고 오르려 한다면 수없이 많은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감내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죽기 전에 그 같은 고통을 느끼려 할 사람은 아마 전무할 것이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전무한 것이다.

그런데 이위소는 분명 그 절벽 아래에 누워 있었다. 그런 그의 의복은 멀쩡하였다. 다시 말해 가시넝쿨을 헤친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무공이라곤 전혀 모르는 그였기에 경공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절벽에 오르려면 반드시 가시넝쿨을 헤쳐야 하는데 그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이 의혹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제대로 조사조차 되지 않았다.

얼마 후 이위소의 죽음은 세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천하를 놀라게 하였던 천재 중의 천재의 죽음치고는 너무도 아쉬웠다.

이후 곡주는 실의에 빠진 듯 늘 의기소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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