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94

분타 지위 협정서 (4)

등록 2003.04.03 18:20수정 2003.04.03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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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어서 안으로 들게. 모두들 기다리고 있네."
"모두들? 누굴…?"

"핫핫! 누구긴 누구? 팔대당주들이지. 자네의 승차를 축하하려고 모두 모여있다네."
"승차라니? 난 승차 안 했는데?"


"핫핫! 이 사람아. 이제 곧 승차할 것 아닌가? 우리도 귀가 있다네. 소성주께서 조만간 철마당에 큰상이 내리신다면서?"
"뭐, 뭐라고? 그 소릴 어디서 들었는가?"

뇌흔의 뒤에 있던 이회옥은 전신이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다. 철기린이 그런 말을 할 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비룡을 마구간에 두고 이곳으로 온 시간은 불과 일 각 정도이다. 그런데 벌써 모두들 알고 있다하니 전율한 것이다.

'세상에…!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잠시 후 이회옥은 뇌흔의 곁에서 술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상명하복이 철저한 무림천자성 외원에서 팔대당주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데 한낱 조련사가 끼어 있다는 것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설사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신다 하더라도 지위도 낮고, 나이도 가장 어리기에 말석(末席)에 앉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회옥은 가장 상석(上席)에 앉은 뇌흔의 바로 오른 쪽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는 차석(次席)이다.

처음 뇌흔이 그 자리에 앉으라고 하였을 때 이회옥은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주도가 뭔지 대강은 알기 때문이었다. 이때 철검당주가 한 마디 하였다.


"핫핫! 이 사람. 싫다는데 왜 자꾸 옆에 앉히려고 그러나? 핫핫! 그러지 말고 앉고 싶다는데 앉게 하게."

뇌흔이야 소성주에게 잘 보였으니 같은 당주급이지만 상석에 앉힌 것에 대한 불만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이회옥은 달랐다. 한낱 조련사인 그를 차석에 앉히려 하는 것에 대하여 불쾌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하하! 이 사람아 내가 주도(酒道)도 모르는 백면서생인줄 아는가?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러지. 여보게들, 이 아이를 우습게 보지 말게. 오늘 부로 소성주님의 어자(馭子 :마부)가 되었네."

"무어? 소성주님의 어자?"
"그렇네. 안 그러면 내가 왜 이러겠는가? 이보게들, 난 아직 자네들과 마찬가지인 당주이네."

뇌흔의 말에 당주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나 앉았다.

소성주의 어자라면 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디를 가든 항상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말을 타든 마차를 타든 곁에 있다가 흉보는 소리 한번만 잘못하면 어느 순간에 목이 달아날지 모른다. 실권(實權)은 전혀 없지만 어떤 면으로 보면 당주들보다 상전일 수도 있는 자리이다. 그렇기에 이회옥이 차석에 앉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뇌흔이 자신에게 영광을 안겨준 복덩이이니 어자 어쩌고 하면서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하지만 이회옥으로서는 마치 가시 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하였다.

당주급들은 거의 대부분 오십 대였다. 사십대 초반으로 보였던 철검당주도 알고 보니 철마당주와 동갑인 오십이 세였다. 워낙 몸에 좋다는 것을 많이 먹었기에 여전히 사십대로 보인 것이다.

이렇듯 아버지뻘도 넘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으니 이회옥으로서는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워낙 음식의 맛과 향이 좋았기에 무심코 당주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술은 조련사들과 마시는 것보다 훨씬 좋은 술이었다. 향기도 좋았고, 혀나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느낌도 월등히 부드러웠다. 그리고 안주 역시 일품이었다.

너무 기름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담백하지도 않았다. 누구의 솜씨인줄 알 수는 없으나 맛과 향 모두가 최고였다. 게다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준 그런 음식처럼 정갈하였다. 무엇보다도 입맛에 착착 들어맞았다.

"이보게들 들었는가?"
"무얼?"

"선무곡 놈들이 요즘 난리를 친다고 하던데…"
"선무곡? 왜문 근처에 있는 쬐끄만한 것을 말하는 겐가?"
"그렇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각종 첩보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곳은 비문당(秘聞堂)이라는 곳이다. 그곳으로 보내지는 첩보는 별의 별 것이 다 있다. 이것들 가운데 추릴 것을 추린 후 면밀히 검토되어 진다. 그 결과 어떻게 대응될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문당이 어떤 분석을 하느냐에 따라 천하의 정세가 바뀐다는 것이다. 입을 연 사람은 비문당의 당주였다. 따라서 팔대당주 가운데 가장 무림 정세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선무곡이라면… 천하에 별 볼일 없는 놈들만 있는 곳인데 그놈들 이야기는 왜 하는가?"

당주 가운데 하나가 좋은 분위기에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는 듯 반문하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게. 얼마 전, 선무곡에 주둔해 있던 본성의 마차에 선무곡의 어린 계집 둘이 치여 죽었다고 하네."
"계집애 둘을…? 흐음! 일을 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게 뭐 별일인가?"
"그러게 말이네.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

비문당 당주의 말에 나머지 당주들은 뭔가 큰일이 났나 싶었는데 별일 아니라 실망했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에는 많은 문파들이 있지만 선무곡은 그 가운데 가장 별 볼일 없는 문파 가운데 하나이다. 인원도 얼마 안 되고, 무공 또한 별 볼일 없는 문파이기 때문이다.

강호는 강자존(强者尊), 약자멸(弱者滅)의 철칙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그리고 은원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산검림(刀山劍林)이 중첩된 곳이라고 하기도 하고, 보보(步步)마다 살기 그득한 곳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매일 매일 크고 작은 일이 벌어지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에는 적지 않은 인명이 사라지기도 하는 곳이다. 이런 판이니 선무곡의 여아(女兒) 둘이 사고로 죽은 것은 사고 축에도 못 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선무곡에서는 매일 같이 분타주의 집무실 앞에 모여 성주님께 사과하라고 난리를 벌이고 있다고 하네."
"뭐? 방금 무어라 하였는가?"
"그놈의 자식들이 감히 누구더러 뭘 어쩌라고 그랬다고?"

가만히 앉아 있던 당주들이 노한 듯 허리를 펴자 비문당주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핫핫! 성주님께 사과하라는 거지."
"자식들이 눈알이 뒤집혔나? 성주님이 누구시라고 감히…?"

"안 되겠네. 당장 가서 이것들을 자근자근 밟아 줘야지."
"아니네. 싹 쓸어버림이 마땅하네."

당주들은 화가 난다는 듯 한 마디씩 해댔다. 비문당주는 다른 당주들을 둘러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사고가 난 뒤에 분타주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어찌 된 영문인지를 면밀하게 따졌다네."
"그래서?"

"그래서는…? 본성의 성규에 따라 토의를 한 끝에 공무(公務) 중에 일어난 우연한 사고였으니 당시 마차를 몰던 제자들은 무죄(無罪)이고, 당연히 아무 책임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네."
"허엄! 당연하지. 설사 공무 중이 아니라면 또 어떤가? 그깟 계집 아이 둘이 뒈진걸 가지고…"

"그러게 말이네."
"아무튼 그런 결론이 내려지자 분타주는 사고를 낸 제자 둘을 다른 곳으로 전출을 보냈다고 하네."

"아니, 그건 왜?"
"핫핫, 왜긴? 이 사람아!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핫핫! 그래 몰라서 묻네. 그러니 속 시원히 말해 보게."
"사고를 낸 놈들이 거기 계속 있으면 선무곡 놈들이 계속해서 처벌을 하라고 귀찮게 할 테니 다른 곳으로 보낸 거지."

"허엄,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군. 분타주가 제법이네."
"그런데 선무곡 놈들은 결코 우연한 사고가 아니고 일부러 저지른 짓이라면서 대표를 뽑아 본성으로 보냈다고 하네."

"뭐하려고?"
"뭐하긴? 사고를 낸 두 놈은 처벌하고, 분타 지위 협정에 대한 문서를 고치자는 거지. 그리고 성주님께 사과하라는 거지."

"미친놈들! 별 볼일 없는 것들을 보살펴줬더니, 뭐? 하늘같은 성주님께 사과를 하라고? 그리고 무슨 문서를 고치자고? 그 자식들 혹시 미친 것 아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핫핫!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런데 성주님께서는 뭐라 하셨는가?"
"핫핫! 뭐라 하셨을 것 같은가?"

"글쎄, 본성에서 그 따위 놈들에게 사과할 필요가 있을까? 체면도 있고 하니 모르는 척 하는 게 상수가 아닐까?"
"하하! 성주께서는 분타주에게 적당히 사과하라고 하셨다네."

"이런…! 성주께서 어찌 그런 하찮은 놈들 때문에…"
"에이! 술 맛 떨어졌네. 그러기에 그깟 놈들 뒈지거나 말거나 애초에 그냥 뒀어야 하는데… 에이!"
"아니네. 성주님의 결정이 옳으이."

지금껏 듣기만 하던 철마당주가 입을 열자 다른 당주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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