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98

빛나는 대머리 독두환(禿頭煥) (3)

등록 2003.04.07 13:37수정 2003.04.0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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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흐음! 그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데. 혹시 시간을 절약할 방법은 없느냐?"
"그, 그건… 으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핫핫! 방법이 있긴 있다고? 좋아, 무슨 방법이든 말해봐라. 본성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은 없다."


머뭇거리던 이회옥은 너무도 진지한 철기린과 눈빛이 마주치자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먹이가 중요합니다. 몸이 허약한 사람에게 보약을 지어 먹이듯 망아지에게도 특별한…"
"그게 무엇이냐? 본좌가 구해 주겠다."

"예! 소인의 생각으론 해동 땅에서 나는 인삼이…"
"인삼? 아하! 홍삼을 말하는 게군. 핫핫! 그 정도라면 문제가 없다. 원단이 지난 직후 황도에 약령시(藥令市)가 열린다. 그때 조선 땅에서 가져온 홍삼(紅蔘)을 몽땅 사들여…"

"저어, 홍삼은 안 됩니다."
"왜?"

"홍삼이란 삼밭에서 캔 수삼을 증포소(蒸包所)에서 증포하여 만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수삼을 특별한 방법으로 쪄서 말린 것입니다. 약으로 달여 먹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망아지에게 그것을 달여 먹일 수는 없습니다. 쓰면 안 먹거든요."
"으음! 그래? 그렇다면 망아지를 끌고 조선까지 가야하느냐?"


"그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조선은 중원과의 교역을 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수삼을 증포하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수삼이 없을 것입니다."
"흐음! 그럼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냐?"
"……!"

이회옥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상전들이란 기분이 좋을 때에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해주지만 기분이 나쁠 때에는 조그마나한 잘못을 저질러도 이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치죄(治罪)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인 것이다.


"으음! 그 방법밖에 없다는 말이지? 으으음!"
"……!"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는 내내 이회옥은 조마조마하였다. 만일 말을 끌고 조선(朝鮮)까지 가서 만들어 오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던 것이다.

지금은 한낮에도 가만히 서 있으면 금방 코끝이 얼어붙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이다. 이른 새벽에는 어찌나 추운지 소변을 보고 돌아서면 바로 얼어붙었다.

어른들의 말을 빌면 이번 겨울이 최근 오십 년이래 가장 추운데 설마 이 겨울에 조선까지 가라고 할까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조선으로 가려면 반드시 대흥안령산맥을 넘어야 한다. 수없이 많은 비적들이 들끓는 곳이 바로 그곳이 아니던가! 잘못하면 얼어죽거나 비명횡사하기 쉽기에 가슴 졸인 것이다.

"핫핫! 핫핫핫! 역시 난… 핫핫! 좋은 방법이 있다."
"예?"

"조선까지는 갈 필요가 없다. 멀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선보다 가까운 곳에 질 좋은 인삼이 많이 나는 곳이 있다."
"……?"

"혹시 선무곡이라고 들어 보았느냐?"
"예에? 서, 선무곡이요?"

불과 며칠 전에 들었는데 어찌 선무곡을 잊었겠는가!

철마당에서 당주들과 회식할 때 들은 이야기 때문에 이회옥은 계속해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었다. 아무 죄도 없는 소녀가 둘이나 죽었는데 마치 파리나 쥐새끼가 죽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에서 충격을 받은 것이다.

선친인 이정기는 무림천자성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정의로운 곳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러면서 나중에라도 무림천자성과 무슨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양보하라 하였다.

정의를 수호하고, 좋은 일만 하는 곳이니 웬만하면 양보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무림천자성이 협조해달라고 요청하면 즉각 협조해주는 것이 천하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날 술에 취해 잘못 들었는가 싶어 수없이 반복해서 생각을 되짚어봐도 두 소녀가 죄를 지었다는 대목은 없었다. 그런데도 죽여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하기는커녕 사과하라고 항의하는 사람들을 쓸어버려야 한다는 소리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래서 무림천자성의 자비로움에 대해 의심이 생기던 터였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성실했던 부친이 잘못 알았을 리 없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그때의 대화 때문에 심히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호오! 선무곡을 아는 모양이구나. 좋아! 내일 네 마음에 드는 말을 끌고 선무곡으로 가라. 그곳에서 비룡만큼 잘 빠진 말로 꼭 만들어 와야 한다."
"예?"

"후후! 내 아우인 무언공자에게 선물하려 한다. 그러니 비룡만큼 뛰어난 말을 만들어 와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으음! 네 나이가 아직 어려 분타에 있는 자들에게 휘둘릴 수 있겠구나. 좋아! 너는 오늘부터 순찰원 소속이고, 선무분타 순찰에 임명되었다."
"예에…?"

"너는 그곳에서 무엇을 하든 자유이다. 대신 비룡만큼 마음에 드는 말을 만들어 와야 한다."
"예? 예에…!"

이회옥은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철기린의 말에 정신이 없었다.

"아, 참! 이것을 받아라!"
"이, 이건…?"

철기린은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것을 떼어 건넸다. 그것은 여인들이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품고 다닌다는 은장도(銀粧刀)보다 약간 큰 소도(小刀)였다.

어떤 짐승의 가죽인지는 모르겠으나 푸른빛이 감도는 가죽은 한눈에 보기에도 마름질이 훌륭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에 박혀 있는 붉은 빛을 발하는 보석도 범상해 보이지 않았다.

"핫핫! 이건 본좌가 네게 내리는 선물이다. 제왕비(帝王秘)라는 물건이다. 핫핫! 왜 제왕비(帝王匕)라 안 그러는지는 본좌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것만 보이면 적어도 무림천자성의 그 어느 누구도 네게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제, 제왕비요?"

"그래! 만일 본좌에게 직접 연락할 일이 있거든 이를 순찰사자에게 보여주고 말하면 될 것이다."
"순찰사자요?"

"그래, 한 달에 한번 순찰사자가 선무곡을 찾는다. 그때 불편 부당한 일이 있거나 요구할 것이 있으면 순찰사자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말을 해라. 그러면 무엇이든 네 뜻대로 해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핫핫! 좋다. 이제 가급적이면 빠른 시간 내에 떠나도록!"
"알겠습니다."

별원을 떠나 철마당으로 돌아간 이회옥은 제왕비가 어떤 물건인지를 알고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철마당주 뇌흔이 그것을 보자마자 허리를 굽혔던 것이다.

사실 제왕비는 철기린의 신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림천자성 차기 성주의 신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원단이 되면 철기린은 만인환시 중에 철룡화존으로부터 한 자루 검을 하사(下賜) 받게 된다. 검신 양편에 걸쳐 열세 개의 선(條)과 오십 개의 별(星)이 새겨진 성조검(星條劍)이 그것이다.

열세 개의 선은 처음 무림천자성에 개파대전을 열었을 때 지부의 숫자를 의미한다. 그리고 검신에 새겨진 별은 현재 중원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오십 개의 지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부가 늘어나면 늘어나는 숫자만큼 더 새겨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차기 무림천자성의 성주라는 징표이다.

어찌되었건 제왕비를 확인한 철마당주는 어투부터가 달라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대를 하던 자에게 차마 존대는 할 수 없어 그러는지 모르지만 말꼬리를 두루뭉실하게 잘라먹고 있었다.

잠시 후 이회옥은 뇌흔을 대동하고 제일향과 제이향의 모든 대완구들을 찬찬히 살필 수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천이백여 마리에 달하는 대완구들 가운데 상당수가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순종 대완구는 상당히 예민하다. 그렇기에 낯선 사람이 가까이 오면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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