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동화> 민우의 하루

아이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시선이 필요합니다

등록 2003.05.27 19:45수정 2003.05.28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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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민우는 아침부터 기분이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침부터 모내기하는 일에 정신이 없으셔서, 민우가 말을 붙일 수도 없고 할머니는 허리 병이 도져서 며칠째 누워 계십니다.


민우는 초등학교 6학년입니다. 계속해서 시골 할아버지 집에서 생활해야하는 지, 중학교도 시골에서 다녀야하는 지, 인천엔 언제 올라갈 지, 궁금한 게 많아도 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매사를 자기 혼자 결정할 만한 나이도 아니고, 이래저래 갑갑하기만 합니다.

민우는 힘이 셉니다. 어려서부터 잔병치레 한번 하지 않았고 사람들이 ‘통뼈’ 라고 부를 정도로 체격도 크고 단단합니다. 운동은 무엇이든지 다 좋아합니다. 특히 축구를 좋아하고 최태욱 선수의 사진이나 자료를 모으는 게 취미입니다. 운동은 좋아하지만 학교 공부에는 취미가 없습니다. 공부는 조금만 집중해도 머리가 아프고 선생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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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애들이 민우를 무서워합니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배짱도 두둑해서 민우 말 한마디면 모두 절절맵니다. 민우는 5학년 때 전학 오기 전까지 인천에서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도회지의 수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민우는 정보의 전달자이기도 합니다. 민우가 본 영화, 민우가 가 본 월드컵 경기장, 민우가 먹어 본 피자, 거기다가 민우가 모아놓은 최태욱 선수의 모든 자료가 아이들에게 큰 흥미 거리입니다.

민우는 아침부터 골이 나서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학교엘 갑니다. 동네 아저씨들이 모내기를 하느라 논에서는 이양기 소리가 요란하고, 어디서 뻐꾸기 우는소리도 들립니다. 며칠 전 자전거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하는 수 없이 터덜터덜 걸어갑니다. 민우는 공연히 심사가 뒤틀려서 입이 삐죽 나왔습니다.

학교에는 이미 아이들이 거의 다 와 있었습니다. 민우네 교실은 애들이 떠드는 소리로 귀가 웅웅거릴 정도였습니다. 민우가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야! 이 새끼들아! 조용히 해!”
“어떤 놈이고 떠들다가 걸리면 국물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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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갑자기 교실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워졌고 이따금 아이들 기침소리 외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해 졌습니다. 여자 애들도 민우의 성깔을 잘 알고 있어서 가만있었습니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수학시간입니다.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 오시자마자


“너희들 숙제 다 해 왔겠지?”
“자, 이제 숙제해 온 공책을 책상 위에 다 내 놓는다.”


아이들은 수학 공책을 책상 위에 내놓았습니다. 선생님이 재차 애들에게 묻습니다.

“숙제 안 해온 사람 누구야! 손들어봐!”
“민우, 너 숙제 해 왔어?”
“아뇨.”
“그런데 왜 손 안 들어? 선생님 말이 안 들려?”
“못 들었어요!”
“뭐라고? 못 들었어?”
“너, 이리 좀 나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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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선생님은 화가 단단히 나셨습니다. 민우는 숙제를 안 해왔는데도 고분고분하지 않았고, 선생님은 그런 민우가 못 마땅하신 지 오늘은 그냥 넘어 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민우를 데리고 교무실로 가셨습니다. 잠시 후에 나타난 두 사람은 표정이 무거웠습니다. 교무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짐작하기에는 민우가 선생님에게 맞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선생님은 민우의 시선을 애써 피하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오전수업은 무겁게 진행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선생님과 민우의 눈치를 살피며 선생님이 묻는 말 외에는 아무도 입을 떼지 않았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전교생이 학년별로 줄을 서서 식당엘 들어갔습니다. 민우가 말 한마디 없이 밥을 다 먹고 일어나며

“야! 빨리 나와. 지금부터 축구 한다.”


그 소리에 애들은 먹던 식판을 설거지통에 내려놓고 우르르 민우를 따라 나갑니다. 6학년이래야 고작 29명이 전부인데 남자는 16명입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8명씩 편을 갈라 축구를 합니다. 밥을 다 먹지 못하고 나온 애들도 불평 한마디 없습니다. 아이들은 별로 신나지도 않은데 민우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공을 찹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였습니다. 민우가 애들을 불러 모으더니,

“자, 수업시간이 시작되어도 교실에 들어가지마! 내 말 안 들으면 죽어. 내가 들어가자고 할 때까지. 알았어?”
“.........”
“알았어? 내 명령이야!”
“알았어.”
(개미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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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애들이 간신히 대답을 했습니다. 오후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습니다. 6학년 남자애들은 종소리를 못 들었다는 듯이 계속 공을 차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담임선생님이 몽둥이를 들고 운동장에 나타나셨습니다.

“너희들 수업 종소리가 안 들려!”
“자, 지금부터 내가 열을 셀 때까지 교실로 안 들어가는 녀석은 가만 안 놔둔다.”
선생님은 모든 사정을 이미 짐작하고 계셨습니다.

“하나, 둘, 셋....”


애들은 민우의 얼굴을 슬금슬금 봅니다. 반장인 현수가 제일 먼저 교실로 뛰어가자 나머지 애들도 따라갔습니다. 운동장엔 민우 혼자 남았습니다. 민우가 오후 수업 한 시간이 끝나서야 교실에 들어왔습니다. 민우가 교실에 들어오자 무거운 침묵이 흐릅니다. 민우가 교탁 앞으로 나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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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반장! 너 이 새끼. 이리 나와!”
“너, 내 말 안 들려? 빨리 나와! 이 새끼야!”


반장이 쭈빗쭈빗 하며 앞으로 나오자, 민우는 발을 높이 치켜들더니 반장 가슴을 냅다 질러댔습니다. ‘퍽’ 소리와 함께 반장 현수가 나가 떨어졌습니다. 현수는 급소를 맞았는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숨을 제대로 못 쉬고 신음을 합니다. 애들이 달려가 현수를 주무르고 누군가 물을 가져다 현수의 입에 한 모금 부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민우가 나섰습니다.
“야, 빨리 가서 선생님 불러와!”

그제서야 애들이 교무실로 달려갔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먼저 오셨고,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모든 선생님이 교실에 달려왔습니다. 어느 선생님인가 불쑥
“민우, 저 녀석은 구제불능이야!” 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 소리에 민우는 책가방을 들고 나가버렸고, 현수는 선생님 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습니다. 6학년 교실은 무거운 분위기로 가라앉았습니다. 수업은 자습으로 대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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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간 민우의 마음은 참담했습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왔다 가셨고, 집안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아파서 며칠 째 아무 것도 잡숫지 못하신 할머니도 자리에서 일어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고, 할아버지는 연신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뱉을 때마다 한숨을 쉬었습니다. 한동안 잠자코 계시던 할아버지가 입을 여셨습니다.

“민우야! 현수네 집에 가자. 빨리 일어서! 함께 가서 현수 부모님께 용서해 달라고 가서 빌자.”

민우는 고분고분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현수네 집으로 향했습니다. 현수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개가 요란하게 짖어댑니다. 민우 할아버지가

“현수야! 현수 어머니, 안에 계세요?”
“아니, 민우 할아버지가 이 밤중에 웬일이세요?”
“이 밤중에 우리 집엘 다 오시고. 어? 민우도 왔구나!”


현수는 오늘 민우에게 맞아 병원에 갔다 온 일을 부모님께 얘기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현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말라고 선생님께 신신당부를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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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현수 어머니! 실은 오늘 우리 민우가 현수를 때렸어요. 현수가 병원에도 갔다 왔다고 해요. 죄송합니다. 이 늙은이가 애를 잘못 키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


한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잠시 후에 현수도 밖으로 나왔습니다, 현수 엄마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신 장애인이십니다.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가 짧아 다리를 심하게 저십니다. 현수 아버지도 어려서 귀를 앓아 소리를 듣지 못하시고 말도 잘 못하시는 장애인이십니다. 현수 엄마가 태연하게 말을 하셨습니다.

“민우 할아버지! 애들이 놀다보면 싸우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싸우면서 크고, 싸우면서 정도 들고 그러잖아요. 괜찮아요. 오늘 우리 현수 저녁밥도 잘 먹고 아무 이상 없어요.”
“현수야! 너 괜찮지? 어디 아픈데 있으면 말해 봐.”


현수는 대답대신 고개를 좌우로 저었습니다. 그러자 한결 분위기가 밝아졌고, 민우 할아버지도 마음이 놓이시는지

“현수 어머니! 고맙습니다. 야, 민우야 얼른 잘못했다고 빌어라. 그리고 현수한테도 미안하다고 그래. 얼른!”
“자....잘 잘못했습니다.”
“현수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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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민우는 그 말 한마디를 하고 눈물이 주르르 얼굴에 흘렀습니다.
“민우야, 괜찮아. 너 오늘 걱정되어서 저녁밥도 못 먹었겠구나. 밥 차려줄게 저녁밥 먹고 가렴.”

민우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습니다.
“아니, 됐어요. 현수 어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민우 할아버지도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습니다.

“민우야, 다시는 그러지 마라.”
“현수 어머니, 용서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러면 가겠습니다.
“그러면 민우 할아버지, 살펴가세요. 민우야 잘 가라.”


민우는 할아버지와 어두운 밤길을 걸었습니다. 어디선가 뻐꾸기 우는소리가 들립니다. 밤에 뻐꾸기 우는소리는 처음 들었습니다. 그 소리가 처량하게 들립니다. 민우는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평소에 별로 보고 싶지 않던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엄마에 대한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며 민우는 밤길을 걷습니다. 어둠 속을 걸으며 민우는 할아버지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할아버지 손이 따뜻합니다. 민우에게 오늘은 잊지 못할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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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릿느릿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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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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