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지를 몽땅 사겠어"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89>돈에 쓴 사랑의 고백

등록 2003.06.26 13:22수정 2003.06.2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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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천 원짜리 돈에 쓴 편지

오천 원짜리 돈에 쓴 편지 ⓒ 이종찬

지난 일요일 밤, 푸름이와 빛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 4명은 오랜만에 가벼운 나들이를 했다. 그날, 백화점 일을 마치고 밤 9시가 조금 지나 집으로 돌아온 아내가 둘째딸 빛나에게 가까운 곳에 바람이라도 쐬러갈까, 라며 지나가는 말처럼 건넸다. 그러자 두 딸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싸 아싸, 라는 합창소리를 냈다.


"바람을 쐬고 싶다고?"
"응. 엄마가 아빠한테 가서 어쩔거냐고 물어보래."
"바람은 집에도 많잖아."
"아빠는. 또 선풍기 바람 쐬라고 할려고 그러지?"
"아빤 피곤한데..."
"아빠아~ 가자아~ 응? 우리 가족끼리 바람 쐬러 간 적이 한번도 없었잖아아~ 응?"

하지만 내가 계속 TV만 바라보며 별 대꾸를 하지 않자, 빛나는 도저히 이대로는 되지 않겠다는 듯 내 바지와 양말까지 들고 와 어서 갈아 입으라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생각 좀 해보고, 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급기야 큰딸 푸름이까지 나섰다.

"애들끼리 동네 한바퀴 돌고 올까?"
"안돼. 이번에는 아빠도 꼭 가야 돼. 엄마 운전 실력도 확인할 겸."
"네 엄마가 운전을 한다고?"
"아빠는. 엄마를 어찌 보고 그렇게 무시해."
"엄마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엄마의 운전 실력을 무시하는 거야."
"그러니까 아빠가 같이 가면 금방 확인할 수 있잖아."

하여튼 이쯤 되면 두 딸을 말릴 수가 없다. 그래. 둘째딸 빛나의 말이나 큰딸 푸름이의 말이 모두 맞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가족끼리의 오붓한 시간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내는 백화점에 다니는 관계로 매일 밤 9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고, 한 달에 한 번인가 월요일에 쉬었다.

나 또한 평일이면 경주에서 지내다가 주말이 되어야 밤 늦게 집으로 들어온다. 아내와 나의 사정이 그러했으니, 나들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두 딸들이 난리법석을 피울 수밖에. 하긴, 두 딸들도 가족들끼리 모두 모여 맛있는 것을 나눠 먹으며 오손도손 이야기하는 그런 가정이 부러웠을 것이다.

"어디로 갈 건데?"
"그냥 비음산 주변이나 한바퀴 돌지 뭐."
"엄마! 아빠도 타고 했는데, 조금 멀리 가서 맛있는 거 좀 사 달라고 하자."
"그래. 기왕 나선 김에 가까운 바닷가로 가지 뭐."
"역시 우리 아빠야!"
"아빠! 최고!"


그날, 우리 가족은 바다가 보이는 진해 행암으로 향했다. 오래 전부터 도로 연수를 하고 있었다는 아내의 운전실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내게 안전벨트를 매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안민터널이 다가오자 1000원짜리 한 장을 미리 준비하라고도 했다.

차는 이내 진해 행암부두로 들어섰다. 행암부두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간이천막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군데 군데 생선회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바다는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물소리만 철벅거리고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바다가 가장 가까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근데 아내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다. 또 삐졌는가 보았다. 아까 진해로 오던 길에 그 놈의 웬수 같은 돈 때문에 약간 다투었다. 차 구입문제, 주택부금 문제 등을 이야기하다가 서로 의견이 약간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잘 나가다가도 그 놈의 돈만 끼어들었다 하면 늘 말썽이었다.

"엄마 아빠 다투니까 싫지?"
"응. 제발 좀 다투지 마. 조금 있다 아빠 딸이 커서 돈 많이 벌어줄게."
"빛나야! 차에 가서 엄마 회 좀 먹을라나 물어봐라."
"생선회 먹을 거야? 나는 생선회가 싫은데."
"바닷가에 왔으면 생선회 구경은 하고 가야지."

이내 빛나가 먹는대, 하면서 쪼르르 달려왔다. 그와 동시에 아내가 차에서 내렸다. 아내는 어쩐 일로 생선회를 다 사 주느냐는 듯이, 나와 생선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랬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먹는 생선회는 참으로 고소했다. 아내와 두 딸들이 번갈아가며 부어주는 소주도 몹시 달았다.

"여기 얼마죠?"
"2만3천 원입니다."
"어! 근데 이건 또 뭐지?"
"아빠! 왜?"
"이거 좀 봐! 누가 돈에다 낚서를 해 놓았네."

생선회값과 소주값을 치르고 거스름돈으로 받은, 율곡 이이 선생의 얼굴이 그려진 오천 원짜리 뒷 면에는 이상한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행운이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어
행운이가 없어지면
나도 같이 없어져
농담으로 듣지마

"아빠, 이건 낚서가 아니라 편지야."
"왜 하필이면 돈에다 이런 편지를 쓸까?"
"요즈음 중고등학교 언니 오빠들은 그렇게 편지를 보내는 게 유행이래. 자기의 사랑고백을 담은 그 돈이 돌고 돌다가 짝사랑하는 애한테 가게 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나, 어쨌다나."

"그으래. 돈에다 편지를 쓰는 것도 유행을 해? 아빠가 학교 다닐 때는 행운의 편지란 게 유행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빠! 행운의 편지 같은 거는 초등학교 2~3학년 때 이미 졸업해."

돈에 쓰는 사랑 고백이라. 그렇다면 요즈음 아이들은 사랑 고백을 할 때에도 은연 중에 돈으로 그 가치를 따진다는 말이 아닌가. 천 원짜리에 쓴 사랑 고백은 천 원의 가치로, 오천 원짜리에 쓴 사랑 고백은 오천 원의 가치로, 그리고 만 원짜리에 쓴 사랑 고백은 만 원의 가치로 말이다.

"푸름, 빛나! 너희들도 중고등학생이 되어 좋아하는 애가 생기면 언니 오빠들처럼 돈에다 편지를 쓸 거야?"
"아빠! 나는 남들 흉내내는 애들이 제일 싫어."
"빛나는?"
"음~ 그 돈으로 편지지를 몽땅 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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