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231

시작된 복수 (7)

등록 2003.09.29 14:37수정 2003.09.29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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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 그래도 아무 소용없을 걸. 내가 바본 줄 아나?'

이회옥은 빙화가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를 짐작하고 희미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것도 아니고, 바닥이나 천장, 혹은 벽을 뚫고 들어간 것도 아니라면 뇌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창살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다.

촘촘하기에 그냥은 통과할 수 없지만 그 가운데 하나라도 빼낼 수만 있다면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공간은 된다.

"당주님! 이쪽은 이상 없습니다."

이회옥이 있는 뇌옥으로 들어선 옥졸은 모든 창살을 일일이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그 가운데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이상 없다는 보고를 한 것이다.

'으음! 흔들리는 건 있어도 빠지는 것은 없어. 그렇다면 누가 어떤 방법으로 들어간 거지? 귀신이 그런 건가? 아님 백짓장처럼 얇은 사람이…? 어휴, 골치 아파!'


빙화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창살에 아무런 이상도 없다면 뇌옥 안에 들어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후후! 예상 대로군.'


이회옥이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고 있을 무렵 빙화의 명이 떨어졌다. 잠시 후 주변은 적막에 휩싸였다.

"일단 철수한다. 현장은 그대로 보존하도록!"
"존명!"

모두가 사라진 뒤 이회옥은 방옥두가 있는 뇌옥 귀퉁이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재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과 뇌흔을 어떻게 죽이나 고민했는데 네놈 덕분이다. 스스로 죽을 길을 찾아둔 것이니 나를 원망치 말도록!"

철검당주 방옥두는 한때 무림색존(武林色尊)이라는 외호로 불렸다. 얼마나 색을 밝혔는지 하룻밤에 서너 계집 정도를 상대해내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공적으로 지목되지 않은 것은 무림천자성이라는 막강한 배경 때문도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의 뛰어난 언변 덕택이었다.

그의 교언영색(巧言令色)에 녹아난 여인들은 자신들이 색마에게 당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아마 지금도 낭군인 방옥두가 오길 기다리는 여인이 강호 곳곳에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게걸스럽던 색행(色行)을 멈춘 것은 연화부인과 수련부인을 얻은 후부터였다.

어쨌거나 말이 많은 자들은 가슴속에 비밀을 담아두기 어려운 법이다. 더더군다나 술을 즐기는 자들은 비밀을 지키기가 더욱 어렵다. 취중에 발설하게 되기 때문이다.

방옥두는 술도 좋아했지만 비밀을 마음에만 담아두지도 못하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태극목장 사건이 있은 후 철기린으로부터 절대 발설하면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받게 되었다.

그 후부터 방옥두는 심한 가슴앓이를 시작하게 되었다.

늘 가슴속에 묵직한 무엇인가가 들어 있는 것이 불편하며, 가끔은 심한 통증까지 느껴지는 그런 가슴앓이였다.

말하고 싶은데 말을 하면 작살날 것 같아 차마 말을 하지 못해 생긴 병이었다. 그런 그를 본 뇌흔은 왜 그러는지 짐작한다는 듯 껄껄 웃으면서 조언을 하였다.

그것은 발설하고 싶지만 해서는 안 될 것들을 따로 기록해 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을 하고 싶을 때마다 그것을 들여다보면 진정될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아니지만 어딘가에 발설했다는 느낌이 들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과연 뇌흔의 조언을 효험이 있었다. 태극목장 건을 기록해두니 그토록 심하던 가슴앓이가 뚝 끊긴 것이다. 방옥두는 그것을 허심록(虛心錄)이라 불렀다.

글자 그대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기록함으로서 마음을 비우는 책이라는 것이다.

처음 허심록에는 태극목장에서 있었던 일들만 기록하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허심록에는 점점 더 많은 비밀들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부정한 방법으로 은자를 모았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언제, 누구에게, 얼만큼의 뇌물을 주었다는 것까지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자리에서 밀려날까 두렵다는 것까지 기록하였다.

이러한 허심록은 철검당주 집무실 바로 뒤에 있는 측간의 서까래 위에 보관되고 있었다. 그 측간은 방옥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당주 전용인지라 안전하다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서까래 위에 홈을 파고 그 안에 넣어 두었기에 설사 누군가가 그 위에 올라가도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들다.

따라서 방옥두 이외에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보거나 만져보지 못한 것이 바로 허심록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방옥두가 아닌 누군가가 허심록을 펼쳐 본 바가 있었다.

이회옥이었다.

부당주에 임명된 후 이회옥은 당주인 뇌흔이 이틀에 한 번 꼴로 베푼 술자리를 같이 하였다.

철마당의 명예를 빛내주었다면서 베푼 연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유난히 기분이 좋았던 뇌흔은 평상시보다 많은 양의 술을 마셨고 결국 만취상태가 되었다.

이날 그는 한번도 발설치 않았던 말을 하였다.

방옥두가 허심록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것이 측간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은 오래 전 방옥두가 고주망태가 되었을 때 들은 이야기인데 하도 비밀이라 하여 지금껏 마음에 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이날 밤, 허심록을 펼쳐든 이회옥은 태극목장을 멸망시킨 자들이 방옥두와 뇌흔 등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부르르 떨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방옥두가 친필로 써놓은 허심록에는 태극목장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개나 소를 죽인 것 같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여 격한 분노로 떤 것이다.

그 날 이회옥은 다시 한번 혈겁을 일으킨 몸통인 철기린과 깃털인 방옥두와 뇌흔, 마지막으로 깃털에 낀 먼지인 나머지 40인의 면면을 반드시 척살하겠다고 천신신명께 맹세하였다.

다음 날, 냉정을 되찾은 이회옥은 원수들이 무림천자성 총단에만 있는 사람들이니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생각하였다.

만일 무모하게 움직인다면 하나나 둘쯤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머지는 영영 죽일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에 먼저 생포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광개토대제로부터 전수 받은 만빙검이 있다 하지만 무림천자성 총단 전체와 싸울 수는 없다. 게다가 한 번 사용하면 적어도 보름간은 사용할 수 없다는 단점도 있다.

하여 어찌하면 들키기 않고 원수들 전부를 척살할 수 있을까를 고심 또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배루난을 발견하였고 그 결과 규환동에 감금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묘안을 떠올린 이회옥은 즉각 실행에 옮겼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뇌흔을 유인하여 죽인 것이다. 물론 그러기 전에 방옥두에게 서찰을 던졌다.

미리 훔쳐두었던 방옥두의 신패를 뇌흔의 시신 곁에 떨어트리는 것으로 모든 일은 끝났다.

예상대로 방옥두는 뇌흔을 죽인 살인범이 되어 뇌옥에 감금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뜻밖의 소득이 있었다.

방옥두가 바로 곁 뇌옥에 감금된 것이 그것이다.

뇌옥에 하옥된 이후 생긴 반 갑자 정도 되는 내공 덕분에 이회옥이 태극일기공으로 흡입할 수 있는 내공이 훨씬 더 늘어나게 되었다.

대략 일 갑자 반 정도의 내공을 쓸 수 있게 된 이회옥은 창살을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규환동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방옥두가 혐의 사실을 인정하고 들어 온 날 이회옥은 창살 가운데 하나를 뽑았고, 그것으로 개 패듯 팬 것이다.

그가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확인한 이회옥은 뽑았던 창살을 제자리에 꼽은 후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창살이 용융(熔融)되었기에 빙화를 비롯한 옥졸들이 아무리 흔들어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 고모, 고모부! 원수 가운데 두 놈을 없앴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태극목장과 관련된 자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조리 지옥으로 보내겠습니다."

순박하기만 했던 태극목장을 세상에서 없앤 악의 무리들에 대한 본격적인 복수의 서막이 오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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