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사과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을까

가을열매들이 주는 삶의 소리를 마음에 담다

등록 2003.10.18 21:53수정 2003.10.1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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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감나무

감나무 ⓒ 김민수

아주 작은 씨앗이 있었다.
씨앗이 흙을 만나 싹을 틔우고 어떤 것은 한해살이 들꽃으로 피고 지기를 반복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나무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은 생의 마지막 순간 또는 새봄에 피었던 새싹을 다시 내려놓는 그 순간이 되면 어김없이 작은 씨앗 속에 자신을 심어놓았고, 그 씨앗들을 흙에 담기 위해 소중하게 보듬고 있었다.


이른 새벽 청명한 가을들녘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다. 가을은 서민들에게 가장 행복한 계절 중에 하나다. 사계 중에서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을 것만 같은 계절은 가을이다.

a

ⓒ 김민수

감나무 잎이 아직 무성하지만 감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머지않아 홍시가 되어 이파리가 다 떨어진 가지마다에서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찾아온 새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줄 터이다.

어린 시절 감나무에 올라가 채 익지도 않는 감을 따서 한입 덥썩 베어먹으면 떫은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삶의 여정에서 때론 떫떠름한 경험을 할 때가 있는데 그것을 미각으로 표현하면 덜 익은 감의 떫은맛일는지도 모르겠다.

그 떫은맛은 아침저녁 찬바람과 따가운 가을햇살에 단맛으로 변해가고 딱딱하기만 하던 감이 연시가 되어 치아가 없는 노인네들도 맛나게 먹을 수 있게 된다.

찬바람과 따가운 가을 햇살이 고난이라면 삶의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그런 떫떠름한 경험들도 견딜만한 고난, 아픔이라는 것이리라.


a 꽃사과-애기사과라고도 부른다.

꽃사과-애기사과라고도 부른다. ⓒ 김민수

꽃사과라고도 하고 애기사과라고도 한단다.
작아도 한입 깨물면 신맛이 입안 가득 퍼지는 앙증스러운 꽃사과가 나는 좋다.

단지 작아서가 아니라 작아도 큰 사과와 같은 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아이들에 대해서 간혹 실수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입니다'라는 말이다. 어린이들은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바로 지금의 희망이요, 현재의 희망이요, 현재의 주인공이다. 그들을 통해서 희망을 보고, 그들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은 그들의 시혜자가 아니라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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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애기사과는 누구를 위해서 만들어졌을까? 나는 새라고 생각한다. 일년 동안 애써 농사를 지은 농장지기를 울리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새들을 위한 사과를 하나 더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닌지.

주렁주렁 사과를 달고 있는 모양을 보면서 나도 내 마음에 저렇게 주렁주렁 아름다운 것들을 맺고 싶다는 소망을 담아본다. 내가 주렁주렁 맺고 있는 것들 중에 저렇게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것은 얼만큼이나 될까? 남들이 볼까 감추고 싶은 것만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은 아닌지.

a 모과

모과 ⓒ 김민수

아주 먼 곳에 있었다.
손이 다다를 수 없는 그 곳에 모과가 앙다문 입술모양을 하고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다. 멀리 있어도 모과차의 상큼한 향내가 전해지는 듯하다.

모과는 과질이 딱딱하다. 그만큼 씨앗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기도 하지만 씨앗을 그만큼 잘 보호해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모과차를 담그기 위해 모과를 썰다보면 씨앗이 있는 부분에는 빈 공간이 있다. 모과에 입장에서 보면 씨앗은 잉태한 아이들, 아이들의 작은 방일까?

진한 모과차는 추운 겨울 어울린다. 온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는 모과차의 감미로운 맛을 통해 잔뜩 긴장했던 몸은 휴식을 얻게 된다. 그래서 나는 모과를 '휴식을 주는 열매'라고 부른다.

휴식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a 산수유

산수유 ⓒ 김민수

산수유의 익는 모양새는 너무 탐스럽다. 붉은 색의 가장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열매를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산수유를 꼽을 것이다. 무언가의 상징이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비'의 종교는 불교요, '사랑'의 종교는 기독교요, '평화'의 상징은 비둘기요, '고난'의 상징은 보라색이다. 물론 그 자체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그 상징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상징은 의미를 가진다.

나를 떠올릴 때 나를 아는 지인들은 어떤 나를 떠올릴까?
욕심이겠지만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a

ⓒ 김민수

산수유는 이파리를 다 떨궈내고 마를 때까지도 나뭇가지에 남아있다 이른 봄 새싹이 돋을 무렵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는 것일지라도.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때가 되면 자리를 비워주는 것, 그것이 자연의 순리리라. 자신의 때가 아님에도, 비켜야 할 때에도 자리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추함을 비웃는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55세에 은퇴할 생각을 하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55세까지만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이후의 삶은 아내와 함께 조용하게 시골에서 생활하며 작은 농촌교회를 섬기며 글도 쓰고, 붓글씨도 배우고, 그림도 배우고, 판화도 배우고 싶다.

붓글씨, 그림, 판화.
배우고 싶었으면서도 제대로 배우질 못했다. 그저 어설프게 흉내를 내보기도 했지만 제대로 한번쯤은 배우고 싶다.

연연하지 않고 싶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떠남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프겠지만.

a 석류

석류 ⓒ 김민수

'나도 제대로 된 석류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여기까지야. 이제 더 이상 석류의 모양새를 만들어 가기에는 내 몸이 너무 딱딱해.'

속이 다 타들어 갈 정도로 애타게 갈망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아니야, 니 모습도 예뻐. 내가 사진에 담아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해 줄께.'

최선을 다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 그것은 이 시대엔 나는 바보라고 자처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바보로 사는 것이 화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 길을 가야만 할 때가 있다.

a

ⓒ 김민수

곁에는 탐스럽게 잘 생긴 모양을 한 석류가 자리하고 있다.
은연중에 '바로 이거야!'하는 생각을 한다.

연약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삶으로 살아지지 못함으로 공허할 때가 있다. 한계라는 것은 그렇게 다가온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면서도 큰 것을 탐하고, 느릿느릿가자고 하면서도 빨리빨리를 외치고, 내면을 얘기하면서도 외모에 치중을 하고, 희망을 얘기하면서도 절망 속에 빠져 살아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한경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나를 잃어버릴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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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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