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시들었으나 끝이 아니었네

가을에 만난 붉은 열매들이 주는 삶의 소리

등록 2003.11.06 07:14수정 2003.11.0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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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좁은잎배풍등(산꽈리)-배풍등과는 달리 잎과 줄기에 털이 없답니다. 독성이 있으니 예쁘다고 먹으면 안됩니다.

좁은잎배풍등(산꽈리)-배풍등과는 달리 잎과 줄기에 털이 없답니다. 독성이 있으니 예쁘다고 먹으면 안됩니다. ⓒ 김민수

이제 곧 겨울이 올 것만 같은 가을 산에 서면 작은 바람에서 바스락거리는 마른 풀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오고, 꽃이 지고 난 자리에 맺혀진 탐스러운 열매들이 하나 둘 마른 숲 속에서 자태를 드러냅니다.


'아, 저 열매를 맺기 위해 그런 꽃이 필요했구나!'

자연은 어느 한 순간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모든 순간마다 절정처럼 살아가지만 그 다음을 기약하고 있습니다. 이른 봄 새싹이 올라올 때 얼마나 예쁜지 그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앙증맞다가, 꽃몽우리를 올리면 그 모습이 또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꽃이 화들짝 피었을 때에도 절정인듯 하다가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때가 또한 절정인 듯 합니다. 그러나 그 열매 안에 들어 있는 씨앗이 흙을 만나고, 다시 싹을 틔우는 모든 시간들이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꽃이 시들어 아쉬웠는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더 아름답다고 해도 좋은 순간이 또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a 홍자단

홍자단 ⓒ 김민수

마치 붉은 보석을 나뭇가지에 달아 놓은 듯 하고, 선홍색의 열매마다 입술을 앙다문 것 같습니다. 다닥다닥 붉은 열매들이 그 어느 계절에도 보여주지 못하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데 하나 둘 세어본 바는 없지만 아마도 피었던 꽃의 숫자보다 그 열매는 적을 것입니다.

비바람도 있었을 터이고, 피는 시기를 놓쳐 차마 열매가 되지 못한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잘한 아픔들을 털어 내고 가지마다 불이 붙은 듯한 붉디붉은 열매를 촘촘하게 달았습니다.


저 예쁜 홍자단의 열매를 하나 둘 따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목걸이도 만들어 주고, 팔찌도 만들어 주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이었다면 그리했을 텐데 이젠 중년의 나이, 그저 상상으로만 즐거울 수 있는 재미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실 사람들도 매 순간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살아가는 것인데 심드렁하게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고 아직 오지 않는 시간 때문에 가슴앓이를 합니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간을 즐길 줄 모르고 항상 무언가를 위해 희생하는 시간으로 살아갑니다.

a 말오줌태

말오줌태 ⓒ 김민수

가을 열매들 중에는 붉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붉은 것은 포장이요, 그 안에 들어있는 씨앗이 본질입니다. 씨앗을 지키고 퍼뜨리기 위한 몸부림이 얼마나 치열했으면 온 몸이 그리 달아올랐겠습니까?


그러나 본질과 비본질을 떠나 이 둘이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껍데기를 벗어버리면 그 안에 본질이 있다는 것, 그것이 흙을 만나면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새들이 깃들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생각하니 그 작은 씨앗에 들어있는 큰 생명이 신비롭기만 합니다.

'애들아, 이 작은 씨앗에 저렇게 큰 나무가 들어있는 거야.'

a 보리수열매-조금 떫지만 아주 맛있습니다. 야산에서 만나시면 씨까지 꼭꼭 씹어 드세요.

보리수열매-조금 떫지만 아주 맛있습니다. 야산에서 만나시면 씨까지 꼭꼭 씹어 드세요. ⓒ 김민수

정말 아주 오랜만에 야산에서 제대로 된 보리수 열매를 보았습니다. 어린 시절 숲은 아주 큰 만물상이었습니다. 가을에 단연 인기가 좋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보리수열매였습니다.

맨 처음에는 정신없이 따먹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떠오르게 되고, 잘 익은 것들을 하나 둘 따기도 하고 주렁주렁 열매를 단 가지를 꺾어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마땅히 담을 곳이 없어 작은 호주머니에 따서 넣고는 깜빡 잊고 동네 아이들과 뒤엉켜 동산에서 놀다보면 척척한 느낌에 '아차!'하지만 이미 보리수열매는 호주머니 속에서 거반 짓물러 버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떫은 맛, 그러나 씨앗까지 꼭꼭 씹으면 씹을수록 달콤하고 구수한 맛이 나는 보리수열매는 작습니다. 그래서 제 맛을 보려면 잘 익은 것들을 하나 둘 따서 손에 올려놓고는 한 입에 '툭!' 털어 넣어야 합니다.

아주 어린 10대에 먹어보았던 보리수열매 그리고 20-30대에는 아주 간혹 운 좋게 보리수열매를 만나면 한줌 정도 따서 먹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것은 아주 풍성해서 실컷 먹고, 아이들 몫까지 땄는데도 주렁주렁 남아 있습니다.

'맛있고, 좋다!'

a 청미래덩굴의 열매

청미래덩굴의 열매 ⓒ 김민수

이제 저렇게 붉은 모습으로 한 겨울도 넉넉히 지낼 청미래덩굴의 열매입니다. 저 열매는 지금도 예쁘지만 겨울에 흰눈을 이고 붉게 달궈진 석탄난로마냥 붉은 얼굴로 봄을 기다리는 모습도 아름답습니다.

봄이면 가시가 달린 줄기를 쑥쑥 올리는데 줄기가 연할 때 줄기를 꺾어 살짝 데치고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입니다. 아, 벌써 군침이 돕니다.

꽃은 작았는데 꽃에 비하면 열매는 어찌도 그리 큰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을 넉넉히 나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크기는 되어야겠다고 해서 이렇게 동글동글 맺힌 것 같습니다.

가을에 만난 아름답고 예쁜 붉은 열매들, 그들이 있기까지는 꽃이 시드는 과정이 있어야 했습니다. 꽃이 피었던 그 아름다운 순간을 미련 없이 보냈을 때 비로소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놓아야 할 것까지도 집착의 집착을 더하며 놓지 못함으로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들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가을이 깊어갑니다. 내 마음을 채우고 있던 것들을 하나 둘 비워야겠습니다. 빈 공간이 있어야 뭔가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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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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