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어머니와 메주를 쑤었습니다

“나두 인저 근력이 다 됐나비다, 내년엔...”

등록 2003.11.28 11:43수정 2003.11.3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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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얼마전 메주를 쑤고 볏짚으로 보기 좋게 묶어 처마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얼마전 메주를 쑤고 볏짚으로 보기 좋게 묶어 처마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 송성영

얼마 전 메주를 쑤기 위해 대전에 계신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셨습니다. 올해만큼은 어머니에게 내가 직접 심은 콩을 자랑하며 메주를 쑤겠노라 ‘굳은 결의’를 다졌는데 산비탈 콩밭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세 차례에 걸쳐 손 제초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잦은 비로 인해 콩밭은 온통 잡초투성이가 되었고 그나마 온전한 콩마저 노루에게 몽땅 헌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콩을 심을 때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습니다(예전에 "노루야, 우리 먹을 것도 남겨둬라" 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습니다). 바가지에 담긴 한움큼에 불과한 콩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다가 아내가 한마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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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루야, 우리 먹을 것도 남겨둬라"

"아무리 팔푼이 농사꾼이라해도 이건 좀 너무 했다."
"그래두 이게 어디여, 밥에다 넣어 먹을 수는 있잖어"
"할 말이 없네."

수확량이 심을 때보다도 더 적었으니 말문이 막힐 노릇이었죠. 결국은 메주 쑬 콩을 따로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콩은 실패했지만 메주라도 확실하게 쑤자. 콩 앞에 굳게 다짐하고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푹푹 삶은 콩을 절구로 빻아 틀에 넣고 부지런히 밟았습니다.

문득 30여 년 전에 어머니와 함께 메주를 밟았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지금의 내 나이였던 어머니께서는 메주를 밟고 있는 어린 나를 올려다보면서 흡족해 하시곤 했습니다.


“그려 그려, 그렇치, 그렇게 골고루 꾹꾹 밟어야지, 어이구 우리 성영이도 이제 다 컸네.”

그때는 몸무게가 30킬로그램 남짓했지만 이제는 85킬로그램 가까이 되는 묵직한 몸으로 메주를 밟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였습니다. 30여 년 전, 그때처럼 어머니와 함께 메주를 밟고 있었으니까요. 그게 바로 엊그제 일만 같은데 벌써 30여 년 세월이 후딱 흘렀습니다.


30년 세월이라는 게 한 순간에 불과한 것만 같습니다. 모든 게 찰나인 듯싶습니다. 어린 나를 떠올리는 순간 나는 이미 중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 칠십 중반을 넘기신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밟아도 밟아도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잘도 다져지는 메주를 밟으며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훌쩍 커버려 30년 세월을 먹어치운 만큼 작고 왜소해 지신 어머니. 머리숱마저 듬성듬성한 어머니의 백발을 마냥 내려다보면서 꾹꾹 메주를 밟았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는 “구석구석 잘 밟아야 메주가 단단해져” 그러셨는데 이제는 그 말씀 대신 “에헤헤, 이거 봐라 에미야, 에비가 밟으니까 금방이다야. 몇 번 안 밟았는데도 메주가 돌짝처럼 단단해졌어”그러십니다.

메주뿐만이 아니라 김장 김치도 담갔습니다. 올해는 배추 농사가 아주 잘되었습니다. 예년에는 늘 뒷북치기 일쑤였는데 올해는 작심하고 종지에 모종을 키웠습니다. 여름 내내 내린 빗줄기를 피해 적당한 시기에 옮겨 심었습니다. 예년에 비해 배추 속도 꽉 찼습니다. 포기수도 작년의 두 배나 되는 250포기 정도를 심었습니다.

늘 그랬듯이 화학비료도 주지 않고 벌레 잡는 ‘독약’도 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우리 배추 참 고소하다고 자랑도 실컷 했습니다(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쌈 싸 드시게 뽑아주려고 속이 덜 찬 배추를 30포기쯤 남겨두었습니다). 배추뿐만 아니라 무도 고맙게 쑥쑥 잘 자라 주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뽑고 다듬어 소금에 절여서 늦은 밤, 버무리기까지 김장 김치를 백 포기 넘게 담갔습니다.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나눠주다 보니 김치가 부족해 다시 오십 포기 정도를 더 담가야 했습니다. 내가 옆에서 좀 거들긴 했지만 어머니와 집사람 둘이서 하루하고 반나절에 150포기 넘게 담갔습니다.

그 다음날 다시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펴 가마솥에 콩을 푹푹 삶아 이 사람 저 사람 퍼줄 요량으로 넉넉하게 청국장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날 아침, 어머니께서는 친구 사이처럼 죽이 잘 맞는 며느리가 며칠 더 쉬셨다 가시라 해도 극구 보따리를 챙기셨습니다.

“안돼야, 너무 오래 있었어. 집에 가면 엉망일껴, 마당은 낙엽들이 쌓여 심난할 거구….”

우리 집에서 자동차를 몰고 어머니가 생활하시는 대전 집으로 가려면 계룡산을 끼고 연산을 거쳐 삼군 사령부가 자리한 신도안쪽으로 돌아서 가게 됩니다.

“엄니 여기가 연산이유, 광산 김씨, 외할머니 태어나셨다는 연산인디….”
“…….”

보통 때 같으면 자세를 바로 하시고 “그려? 여기가 연산이여? 그람 여기가 니들 외할머니 고향인디…” 하시며 하염없이 연산 들녘을 내다보셨을 터인데 아무런 대꾸가 없으셨습니다.

“엄니! 여기가 연산이여! 외할머니 고향 연산, 여기가 연산이라니께….”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했지만 묵묵부답이셨습니다.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계시는 어머니가 아프게 잡혀왔습니다.

열여덟, 꽃다운 나이에 기울어져 가는 송씨 집안의 셋째 아들에게 시집와 시부모 다 모시고 삯바느질에서부터 농사일, 두부장수, 과일장사에 이르기까지 온갖 힘겨운 일들을 짊어지고 7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셨던 어머니. 오십 갓 넘어 일찍이 남편과 사별하고 칠십 중반을 넘기셨는데도 자식들 부담 될까봐, 자식들 손길 다 뿌리치시고 고집스럽게 홀로 생활하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여전히 자식들을 위해 고생을 낙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음날 어머니께서 알려주신 방법대로 아내와 함께 꼬들꼬들해진 메주를 볏짚으로 보기 좋게 묶었습니다. 처마 끝에 메주를 달아 매며 예전에 어머니께서 저에게 그러셨듯이 우리 아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말해주기도 전에 혼잣말로 그랬습니다.

“올해는 콩이 좋아서 메주가 잘 뜰 껴.”

혼잣말을 내뱉는 순간 어머니와 함께 메주를 밟으며 꾹꾹 눌러 참았던 감정이 꾸역꾸역 올라왔습니다. 메주를 쑤면서 하셨던 어머니 말씀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나두 인저 근력이 다 됐나비다, 내년에 메주를 다시 쑤게 될지 모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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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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