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은 그래도 DJ보다 행복하다

[정치 톺아보기 39] 클러스터와 동남권 산업벨트, 노무현의 '다리'

등록 2003.11.28 12:33수정 2003.12.01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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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오후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대통령.
지난 3일 오후 김대중도서관 개관식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대통령.

요즘 노무현 대통령이 즐겨 사용하는 낯선 용어 중의 하나가 '클러스터'(cluster)이다.

엊그제(11월27일) 오전 경남 진해에서 열린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기공식 연설에서도 이 용어를 썼고, 그 전날(26일) 전북지역 언론인과의 만남에서도 썼다. 또 그 며칠 전에도, '2만 달러 시대 도약을 위한 대학 경쟁력 강화 방안 보고회'(11월21일)에서도 그 용어를 사용했다.

이처럼 노 대통령이 지방에 갈 때마다, 혹은 참여정부의 핵심 정책과제인 '국가균형발전'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밥상의 조치개처럼 빠지지 않는 것이 이 '클러스터'라는 낯선 용어이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산업 클러스터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

클러스터는 원래 노 대통령이 좋아하는 컴퓨터 용어이다. 호기심 많은 노 대통령은 '백수' 시절에 컴퓨터를 직접 해체해 보고 '노하우'라는 인명관리 프로그램을 만든 적도 있다.

흔히 집적지(集積地)로 번역되는 클러스터의 사전적 의미는 '하드디스크드라이브 위에 파일을 저장하는 논리적 단위'이다. 이 용어는 정보기술 영업이나 기반시설에서, 하나의 공용 제어설비나 서버에 접속되어 있는 단말기·워크스테이션들의 그룹을 총칭하는 용어로도 확장되어 사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 같은 지식기반 시대에 지역과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유효한 수단으로 부상한 클러스터는 일정지역에 기업과 대학, 연구소 등이 모여서 상호작용을 통하여 지식과 기술을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 노 대통령도 주로 이런 뜻으로 산업 클러스터 혹은 혁신 클러스터라는 용어를 즐겨 쓴다.


산업 클러스터는 기업·대학·연구소 등이 특정 지역에 모여 네트워크를 구축해 사업전개, 기술개발, 부품조달, 인력·정보교류 등에서 시너지(상승) 효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산업 집적지를 의미한다. 50년대 이후 급성장한 미국 실리콘밸리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아무 것이나 한 곳에 모은다고 산업 클러스터가 되는 것은 아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정의에 따르면 혁신 클러스터는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생산기술에 연계된 독립성이 강한 기업들과 지식생산기관(대학·연구기관·지식제공산업), 지식집약 사업 브로커, 고객 네트워크로 형성된다. 혁신 클러스터 내에 있는 기업들은 유기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집단적 부를 공유하는 공간적 독점환경을 형성하고 이를 함께 향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정부도 지역산업 경쟁력 높이기 위해 지역별로 클러스터 육성정책 입안

최근 우리 정부도 지역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지역별로 클러스터 육성 정책을 입안하고 있다. 그간 한국 경제 성장의 엔진이었던 기업집단형(재벌) 발전모델이 한계에 봉착하고, 벤처가 버블 붕괴와 각종 게이트로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클러스터는 그 대안으로 강력하게 부상중이다.

최근 노 대통령이 지역혁신 혹은 국가혁신 클러스터라는 용어를 가장 많이 쓴 것은 지난 12일 대전·충남 언론과의 만남에서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술집적단지인 '대덕밸리'가 있는 곳이니 어찌 보면 적재적소에서 사용한 것이다.

"지방 하면 대체로 수도권을 제외한 전 지역인데 그 중에서도 지방화시대가 열리면 제일 전망이 밝은 곳이 충청권이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대전·충남도 매우 좋은 기회를 맞이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지방화 전략 중에는 지역의 학교와 산업을 함께 연결시키고 그것을 기술혁신의 중심으로 삼아나가는 '지역혁신 산학연 클러스트' 전략이 있다. …

그런 관점에서 보면 충청권에는 대덕연구단지라고 하는 아주 고도의 지식집적단지가 있어서 이것은 '국가혁신 클러스트'가 될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고, 오늘 여러분들은 대전·충남이지만 충청북도의 오송과 오창 이런 단지들도 굉장히 첨단산업들을 수용할 수 있다.

충청남도에 얼른 기억나는 것이 없어서 말씀을 못 드리지만 대덕단지를 중심으로 해서 상당히 높은 기술수준의 산업이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저는 그렇게 본다. 그래서 그것이 대개 전략인데 저는 대전·충남은 매우 전망이 밝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27일 경남 진해에서 거행된 부산-거제간 연결도로 건설공사 기공식에 참석해서도 다시 클러스터를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부산 강서구 가덕도와 경남 거제시 장목면 간 8.2km 길이에 건설될 예정인 '거가대교'의 경제유발효과를 거론하면서 부산-경남을 잇는 동남권 산업벨트의 대동맥 역할을 할 이 연결도로가 국가 발전의 핵심 클러스터를 구축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경제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2010년까지 약 4조 원의 생산 유발과 200만 명의 고용 창출효과가 기대됩니다. 아울러 이 지역의 항만과 녹산·신호공단, 그리고 거제 조선단지가 연계되어 '국가발전의 핵심 클러스터'를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클러스터 전략과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전략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차용한 것

지난 5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펴낸 <클러스터> 책 표지.
지난 5월 삼성경제연구소에서 펴낸 <클러스터> 책 표지.
우리나라에서 클러스터 전략을 처음 체계적으로 소개한 곳은 삼성경제연구소이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지난 5월에 펴낸 <한국산업과 지역의 생존전략 클러스터>라는 제목의 책은 지역의 생존전략으로서의 클러스터를 한국산업 전략 차원에서 모색한 구체적인 사례를 담은 연구서이다.

이 책은 산학협동의 바이오클러스터로 분류되는 미국 샌디에이고, 기술혁신의 클러스터로 변신 중인 대덕밸리, 북유럽의 IT 클러스터인 시스타와 울루 등 10여 곳의 사례를 다루고 있다.

결국 지역혁신 혹은 국가혁신 클러스터 전략은 삼성경제연구소가 창안해 정부가 차용한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 전략과 함께 노 대통령이 좋아하는 삼성의 전략용어인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방혁신 클러스트 전략은 김대중(DJ) 정부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른바 '지역등권주의'를 내세운 DJP 지역연합으로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에 성공한 김대중 정부가 직면한 최대의 난제는 IMF 구제금융이라는 외환(外患)보다 오히려 지역주의라는 내우(內憂)였다. DJ 정부에서 공보수석을 지낸 P씨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대통령이 부산, 대구에만 가면 정말 분위기가 싸늘했다. 행사 참석자들이 박수를 쳐도 냉랭하고 어색했다. 차라리 IMF라는 외부의 위기상황은 맞서서 극복할 수 있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지역주의의 망령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DJ는 영남에 갈 때마다 '나는 호남 대통령이 아니고 전국민의 대통령이다,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는 말로 국민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표시했으나 영남 정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참모들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실제로 집권 초기부터 DJ 정부를 괴롭힌 '여소야대'에 기반한 영남의 지역주의는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더욱 더 기승을 부렸다. 영남에선 DJ를 두들길수록 더 표가 나온다는 것이 정치권의 정설이었다. 영남의 일부 정치인들은 '정권 교체 후 대구·경북의 맥주공장을 전북으로 떼어갔다'느니 '부산·경남의 아들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있고 그 자리를 전라도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느니 하는 원색적인 마타도어를 공공연하게 퍼뜨렸다.

지난 8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코엑스 인터콘티넨털호텔에서 열린 2003 하버드 국제학생회의에서 퇴임후 첫 공개연설을 마친뒤 차를 타고 있다.
지난 8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코엑스 인터콘티넨털호텔에서 열린 2003 하버드 국제학생회의에서 퇴임후 첫 공개연설을 마친뒤 차를 타고 있다.오마이뉴스 이종호

민주당·DJ 정부의 동남특위와 이른바 동진정책

그때는 금융권 구조조정을 시작으로 모든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 인원을 대거 감축하고 모든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던 긴축상황이었다. 그것은 영남 출신들만이 겪는 시련이 아니었지만 정치인들의 혹세무민에 혹한 영남지역 주민들은 적지 않았다.

선거를 앞두고 다급해진 민주당으로서는 총재인 DJ에게 영남 민심을 다독거릴 특단의 대책을 요청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부산·경남 출신으로 지역주의와 정면으로 맞서온 노무현 부총재를 위원장으로 한 동남특위(東南特委)와 이른바 동진(東進)정책이었다.

DJ 정부의 동진정책은 영남 주민들의 민심과 '표'를 얻는데는 실패했다. 또 동진정책의 대표적 사례이자 지역혁신 클러스터인 '대구 밀라노 프로젝트' 역시 실패한 사례로 꼽힌다.

밀라노 프로젝트 실패의 교훈은 그 프로젝트의 정치적 배경을 떠나서 이러한 정책이 지역시장의 독자적 노력에 의해 추진되었다기보다는 중앙정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즉, 산업집적은 중앙정부가 특정 산업을 지정하고 이를 촉진하기 위해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산업인프라를 갖추어놓는다고 이루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혁신 클러스터를 만들어 낼 전략산업의 선정은 지역의 시장역량에 의거하여 자발적으로 합의해야 하고, 중앙정부는 지역간의 경쟁과 협력을 유도하는 최소한의 개입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정치적 배경을 가진 동진정책이 영남 주민들의 표를 얻는데는 실패했을망정, 영남지역은 그 정책의 결과물을 향유하고 있고 또 결과물들이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노무현 동남특위위원장에게 맡겨진 삼성자동차 매각·부산신항만 건설 과제

당시 노무현 동남특위 위원장에게 떨어진 두 가지 핵심과제는 삼성자동차 매각 문제와 부산신항만 건설 문제였다.

당시 부산 사람들은 대부분 삼성자동차 해외매각을 원하지 않았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물론 보수언론들도 '아시아자동차공장(광주 소재)은 끄떡없다'느니 '국가 기간산업을 외국에 헐값으로 판다'느니 하면서 지역주의를 선동해댔다.

그러나 노무현 부총재는 고향사람들에게 'DJ한테 붙어먹었다'는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삼성자동차를 해외에 매각해야 한다"고 직접 나서서 이들을 설득했다. 그 선택이 옳은 것이지 그른 것인지는 몰라도, 분명한 사실은 노무현의 노력이 없었으면 오늘의 '르노삼성'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노 대통령이 흔히 쓰는 표현대로 '통밥을 잘 굴리는' 정치인 노무현이 고향사람들에게 욕만 얻어먹은 것은 아니다. 노무현 동남특위 위원장은 비록 부산 선거에서는 떨어졌지만, DJ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2000년 12월 부산신항만 민자사업 기공식을 갖고 이 지역 주민들의 박수를 받았다. 또 부산·진해지역은 DJ 정부에서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되어 동북아 물류·생산거점으로서 우리나라 경제의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 노무현은 27일 부산 가덕도와 경남 거제도를 연결하는 '거가대교' 기공식에서 동남권산업벨트의 대동맥 역할을 강조하며 이렇게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지역의 미래는 창창하다. 동북아지역이 세계경제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 대한민국은 동북아의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 부산·경남지역이 있다. 부산·경남은 대한민국의 동북아 경제중심계획을 선도해갈 번영의 중심무대이다."

지난 2월 27일 오후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고건 총리및 신임각료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기자회견장으로 향하고 있다.
지난 2월 27일 오후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고건 총리및 신임각료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기자회견장으로 향하고 있다.청와대 제공

노무현은 그래도 지역주의의 벽에 둘러싸인 DJ 때보다는 낫다

노무현 정부는 DJ 정부로부터 엄청난 '카드 빚'을 안고 출발했다고 '엄살'을 떨지만, IMF 구제금융으로 온 나라가 거덜나고 국고가 텅텅 빈 채로 나라를 인수받은 DJ 때보다는 나았다. 또 노 대통령은 적어도 호남에서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영남 출신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집권하자마자 지역주의의 벽을 맞닥뜨려 절망감을 느껴야 했던 DJ에 비하면 훨씬 더 유리한 조건에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셈이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정치인 노무현'은 고향에 가서 "성공해서 고향에 꼭 돌아가고 싶다"는 '인간적인 호소'와 함께 "부산·경남을 동북아 경제의 중심기지로 육성하겠다"고 '선물'을 쏟아놓고 "경남에서 대통령이 나왔으니 뭔가 있겠지 하는 기대감을 은근히 갖고 있는 줄 안다"면서 "(이런 기대감은) 나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다"고 말해도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는 - 물론 그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 정치적 환경에 놓여 있다.

이런 환경에서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것은 어찌 보면 '행복한 고민' 속에서 나온 '배부른 투정'으로 비칠 수도 있다. 노 대통령은 27일 경남도민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경남은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면서 "경남은 복받은 곳이다"고 말했지만, DJ에 견주면 노 대통령이야말로 '복받은' 대통령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1월 5일 청와대에서 열린 사회 각계 원로 지식인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맏형이 되고 싶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면서 "(후배들에게) 새시대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겠다"고 자신의 역할을 밝힌 적이 있다.

지방분권주의자인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과 경남을 잇는 '거가대교'를 시작으로 나라의 곳곳에 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해 그것을 연결하는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다리를 놓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계층과 세대간의 마음과 마음을 잇는 진정한 '화합과 번영의 가교'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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